brunch

감정 기복과의 동거

하루하루를 살아 내는 일

by 김바다

이미 찾아온 극심한 감정 기복을 불청객이라는 이유로 쫓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내가 겪는 증상에 조울증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고 했다. 성인과 아동은 진료 기준이 있지만 청소년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금부터 나는 그것을 기복이라고 부르겠다.


기복을 쫓아내는 대신 나는 기복과의 동거를 선택했다. 지금은 서로 삐걱이더라도 언젠가는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새처럼 기복이 내게서 독립하기를 바라며. 물론 기복이 내게서 독립하는 대신 내가 기복으로부터 독립해도 좋다.

우선 나의 경우 아침에는 잠에 취해 내 상태 중 뭐가 고조이고 뭐가 저조인지 제대로 분간을 못하는 상태다. 10시까지는 그런 편이라고 할 수 있다. 10시가 지나면서 점점 정신이 들면 고조가 먼저 고개를 든다. 나는 이 시간에 주로 글을 쓴다. 글도 잘 써질 때 써야 스트레스를 덜 받고 오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손이 가는 대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으면서 타자가 빨라진다. 글에는 막힘이 없고 설령 조금 막히더라도 금방 해결된다. 이때는 점심도 거르고 글에만 몰두하게 된다. ADHD 치료를 받기 전에 있었던 과몰입 증상이 되돌아온 것처럼 느껴진다.

점심을 거른 것에 대한 보복인지 오후로 접어들면 뒤늦게 잠에서 깬 저조가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민다. 오후 3시 즈음이면 고조는 퇴근하고 그 자리를 무력감이 채우게 된다. 이때 쓴 글들을 보면 우선 문장력이 매우 엉망이다. 전부 짧게 끊겨 있으며 하나같이 거기서 거기인 어휘나 종결 어미를 사용하고 있다.

가끔 운이 좋으면 글을 씀으로써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보통은 뇌를 비우고 게임을 하거나 슬픈 동영상을 보며 펑펑 우는 편이다. 점심을 안 먹었으므로 배가 고파서 더 우울할 수 있으니 일단 입에 무언가 물면 상태가 조금이나마 나아진다.

입에 간식이 들어왔다고 해서 내가 만능이 되는 건 아니다. 특히 학교나 학원에서는 이 시간대에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이 있는데, 당연히 제대로 안 된다. 이때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왜 이런 간단한 것도 완벽하게 못하는지 스스로를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달래듯 스스로를 달래서 어떻게든 끝내는 것이다.

‘당연히 제대로 안 된다’라고 생각하면 ‘왜 이것도 못하지?’라는 질문을 원천 차단할 수 있다. 당연히 원래 제대로 안 되는 것이기에 그렇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고 멋대로 생각해보자. 제대로 하고 있는 사람은 억울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을 읽을 수 없을 테니 문제는 없다.

밤에는 나의 건강을 위해 일찍 자는 것이 좋다. 하필 이때 퇴근했던 고조가 다시 고개를 들이밀면 자기가 정말 싫지만 이때도 잘 달래서 자도록 하자. 나의 경우는 고조가 원하는 대로 글을 짧게 써준 뒤 다음날 아침에 퇴고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잠에 드는 편이다. 이런 식으로 또 하루를 버텨 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