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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킴 Oct 30. 2020

02. 남미 여행 같이 안 가면 애 안 낳을 거야

내가 미련 없이 임신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한 건

내년이면 서른, 이제는 내 기준에도 마냥 젊지만은 않은 나이라서 남편에게 내 나이를 핑계 삼아 임신 계획을 차일피일 미루는 것에도 한계가 왔다. 나도 막연히 아이를 원하긴 했지만 여러 가지 두려움이 많았고, 결국 임신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기 전에 뭔가 큰 한 건을 성취하고 싶었다. 뭐가 좋을까? 내가 미련 없이 임신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한 건!


나는 장거리 그리고 장기간 여행을 즐기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학창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에 스무 살이 되어서야 스스로 돈을 벌어서 인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가봤다. 대학교 다니는 내내 학기 중에는 공부하며 알바를 해서 열심히 돈을 모았고 방학이 되면 한 두 달 동안 혼자 훌쩍 여행을 떠나곤 했다. 여행이란 나의 경제적 독립과 무한한 자유를 의미했고 그것은 성인이 된 내 인생의 핵심 가치였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동안 우연히 살사댄스를 배우게 되면서 남미 출신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는데 남미의 자유롭고 느긋한 문화에 반해서 남미 여행을 꼭 가보고 싶었었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동안은 열심히 알바를 해도 겨우 생활비를 대며 학교에 다니느라 여행 다닐 여윳돈이 없어서 엎어지면 코 닿을 남미를 한 번도 못 가본 것이 너무 아쉬웠다. 아이를 가지게 되면 남미까지 한 두 달씩 떠나는 멀고 긴 여행을 다닐 자유는 영영 포기해야 할 테니 임신을 계획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미 배낭여행을 갈 수 있다면 미련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이제는 돈도 벌고 함께 떠날 든든한 남편도 있으니 임신 계획을 하기 전에 두 달 정도 남미 여행을 같이 가자고 해보는 거다.


 “미쳤어? 두 달 동안이나? 너는 프리랜서라 그렇다 쳐도, 내 직장은 어떡하라고? 아이 계획을 하려면 돈을 더 모아야지 여행 가서 쓸 돈이 어디에 있어? 안돼 안돼.” 남편은 극구 반대했다. 캐나다에서는 십 대들도 흔하게 알바를 하는데 남편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끊임없이 돈을 벌어 온 부지런하고 보수적인 개미 타입이었다. 게다가 그 황소고집은 말도 못 한다. 예상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돈을 모으면 뭐해? 남미 여행 같이 안 가면 애를 안 낳을 건데?” 나는 이제 아기를 빌미로 남편을 협박했다. 물론 회유 작전도 펼쳤다.


 “당신 지금 직장에 만족하는 거 알지만 난 자기가 이번 계약 연장 안 하고 그만두더라도 더 좋은 직장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 어차피 미주 쪽 여정이니까 여행 전후로 토론토 시댁에서도 느긋하게 머물면서 당신 가족들과도 시간 보내면 좋지 않겠어? 크리스마스 때 집에 못 간 지 몇 년 됐지? 6년?”


나의 끈질긴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6개월이나 걸려서야 결국 남편의 예스를 받아냈다.


우리는 교통비 포함 총예산 천만 원으로 4개월 동안의 캐나다와 남미 여행을 계획했다. 2016년 9월, 남편 직장 계약이 끝나고 퇴직금을 받은 후 각자의 직장을 정리하고 떠나서 토론토에 있는 시댁에 3주 있다가 페루에서 3주, 칠레에서 5주 동안 여행하고 다시 토론토로 돌아와 연말과 새해를 남편 가족들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


남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비행기 표부터 지르면서도 마음 한쪽에는 부담감도 있었다. ‘여행 다녀와서 막상 아이가 안 생기면 남편에게 미안해서 어쩌지? 결혼 2년 동안 별다른 피임 없이도 임신이 안 됐으니 혹시 우리 난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걱정이 되다가도 ‘아니야 아니야, 너무 앞서서 걱정하지는 말자. 아이가 생기게 되면 이런 여행은 꿈도 못 꿀 테니 일단은 떠나고 보는 거야.’


나는 뜨거운 남미의 태양부터 눈보라가 몰아치는 토론토의 겨울까지 대비하면서도 최대한 가볍게 짐을 꾸리기 위해 머리를 싸매며 행복한 기대감에 부풀었다.


결국은 갔다. 마추픽추. (20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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