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선 천도교청년회 중앙본부 회장을 만나서
[편집실 주]이 글은 <개벽신문> 87호 (2019.8)에 게재되었습니다.
[필자 주] 천도교청년회가 100주년을 맞이한다. 지난 2월 천도교청년회장에 선출된 이재선 천도교청년회장을 만나 천도교청년회가 걸어 온 100년의 역사 앞에 새로운 100년을 향한 다짐을 들어 보았다. 100년 전, 시대의 어둠을 걷어내고 새 세상을 열던 청년들 중 하나가 100년 전 오늘과 현재를 오가며 여기 서 있다.
신채원 : 반갑습니다. 4월 1일자로 공식임기가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올해 3.1운동 100주년이기도 한 뜻깊은 해여서 청년회장을 선뜻 맡겠다고 마음먹기가 쉽지는 않았겠어요.
이재선(천도교청년회본부 회장) : 부담이 좀 크기는 했어요. 돌아보니, 어느덧, 제가 청년회 활동을 가장 오랜 시간 해 온 사람이 되었더라고요. 그래서 100주년을 기리는 의미, 100주년의 상징, 선배들의 노고 이런 것들을 잘 알려야겠다는 고민이 필요했고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에 회장 맡는 것을 결심했죠.
오래 활동하셨다고 하셨는데, 천도교에는 어떻게 입교하게 되었나요? 천도교 청년들을 만나면 꼭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어요. 천도교가 타 종교에 비해 대중적이지 않다 보니까 친구들이나 주변 분들에게 이해받거나 인정받기 어렵지 않았을까 여쭙고 싶었어요.
이재선 : 저도 어릴 때 친구 따라 교회를 많이 다녔죠. 교회에 가면 어릴 때였는데도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라는 교리가 당사자에 한정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할아버지는 신앙생활을 안 하셨는데,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할아버지가 회개해야 천국 가신다고 하시더군요. 그 말이 구원의 메시지로 볼 수 있지만, 저에게는 어린 마음에 저주의 메시지로 다가왔어요. 아버지께서 천도교에 입교하시고 저를 데려가셨는데, 어르신들이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 맞절하고 존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의 문화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요.
교회 가면 예수만 잘 믿으면 된다고 했지만 천도교에서는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잘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었고요. 저에게도 천도교에 대해 지금까지도 강렬하게 남아 있는 첫인상이 바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메시지였어요.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천도교인으로 신앙을 가지고 성장한 거군요.
이재선 : 그렇다기보다는, 천도교에 대한 고민을 20대 때 오래 했지요. 정식입교는 2004년 군대 제대 후였어요. 아버지 따라 교당을 다니던 중에도 교회에 많이 갔어요. 친구들이랑 놀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천도교가 어린 시절 저의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합니다. 매주 교당에 가면 제가 해야 할 미션이 있었어요. 천도교 교당은 궁을기와 태극기를 시일에 매번 계양을 해요. 지금도 중앙대교당에 깃대가 있고 그 깃대에 궁을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걸려 있어요. 비가 오나 눈이오나 시일 날에 태극기와 궁을기를 걸었죠. 그런 일들이 저의 의무였어요.
어린 소년의 눈에 비친 천도교당의 풍경은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이재선 : 제가 어릴 때 다니던 교당엔 어르신들도 많았고. 매 시일마다 오시는 분들이 4~50명 정도였어요. 4~50명이 왔다는 것은 절을 4~50번을 했다는 거예요. 모두가 맞절을 하는 장면들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문화충격이라고 했지만, 감동 비슷한 것 아니었을까요?
오늘은 천도교청년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과거의 이야기부터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어린이라는 말을 만드신 방정환 선생을 비롯한 당시의 천도교청년회에서 시작된 문화운동 이야기도, 세대간, 계층 간 다 떠나서 우리가 모두 개벽하자고 시작한 운동이었잖아요.
이재선 : 천도교청년회는 3.1혁명과 떼 놓을 수 없습니다. 3.1독립선언을 의암 손병희 선생과 천도교 지도부들이 적극 가담하였고, 그로 인해 교단이 와해되었고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교단 내 청년 지식인들이 힘을 모아 교리를 바탕으로 교단을 수습하자고 만들어진 조직이 바로 ‘청년교리강연부’였어요. 1919년 9월 2일에 발족합니다.
1919년 9월...그 몇 달 전에 3.1운동으로 수 천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멈추지 않았던 조선의 청년들이 있었군요. 마음이 숙연해지네요.
이재선 : 그 분들 대부분이 3.1운동의 주도자였습니다. 교단을 수습하기 위한 고민을 쌓아가면서 1920년에 ‘천도교청년회’라는 이름이 세상에 나옵니다. ‘교리강연부’에서 ‘천도교청년 회’라는 이름으로 발족하게 된 거죠. 그 첫 사업이 <개벽>지의 창간이었습니다.
천도교청년회 100주년의 의미가 특별하게 다가오네요. 저는 동학에서부터 이야기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개벽파의 선언과도 하나의 결로 보게 됩니다. 종교의 틀을 벗어나 지금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시점에서 결국 오늘날 천도교청년회에서 꿈꾸는 것이 새로운 문화운동 인 것 같습니다.
이재선 :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결국 한 뿌리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개벽신문-개벽하는 사람들’은 천도교청년회와 한 정신으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문화를 소비하는 것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화를 소비하도록 만드는 창작의 영역 안에서 조금은 내려놓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합니다. 현대인들은 매스미디어에 노출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3~4분 안에 원하는 정보를 습득해야하거든요. 지금 이 이야기도 천도교 청년회의 역사가 어떤 거냐고 묻는다면 천도교 청년들이 계몽운동을 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일 거라고요.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관심의 폭은 외연으로 확대되고, 확대된 외연은 내 안으로 갈무리하는 것이 발전되면 좋지만, 그 과정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 같아요.
저는 그것이 실천이라고 봅니다. 동학에서 시작된 개벽의 정신이 실천으로 이어지는 가르침으로 봅니다만,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 그 정신의 실천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그 당시의 실천이라 함은 목숨을 걸어야 했을 거 아니에요. 그런 면에서 보면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이재선 : 활동가로서의 삶, 그리고 신앙인으로서의 삶이 남들과 조금 다른 것이 바로 그 ‘실천’에 있는 것 같습니다. 청년회장이 되면서 제가 고민했던 것을 펼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저는 다른 청년들과는 조금 다른 삶의 결을 가지고 왔어요. ‘천도교인인 활동가’로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었지만 동학민족통일회 상근자로 활동가가 되었어요. 천도교사상을 가진 통일운동을 하는 단체입니다. ‘이 일이라면 해볼 만하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청년들을 만나 현장의 고민들을 체감할 때 여러 감정이 교차하죠.
다른 활동가들을 만나면 어떤가요? 고민들은 다 비슷하지 않나요?
이재선 : 이른바 사회운동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본인들의 생활은 책임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도 활동가로 살아가기 위해, 생계는 다른 일을 통해 해결해 왔어요. 활동가들이 갖는 딜레마죠. 경제적인 부분과 나의 활동이 주는 비전. 요즘 청년들이 워라벨(Work and Life Balance : 일과 삶의 균형)을 중요시 여기더라고요. 쉽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말 같아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으로서 깊이 공감합니다. 청년회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천도교청년회는 우리 근현대사와 함께 해 온 공적들이 많습니다. 천도교청년회가 100년을 걸어온 역사를 볼 때, 청년회장님께서 꼭 기억할만한 사건이나 인물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이재선 : 공적이라기보다 아쉬움이 남는 일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천도교청년회가 1999년인 20년 전, 제암리, 고주리 추모 사업을 시작했어요. 선양사업 준비모임을 했고 그 이듬해에서 추모제를 시작해서 4년 전부터는 화성시에서 직접 추모제를 맡아서 하고 있어요. 16년간 천도교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해 왔고 대학생단과 교단 전체가 합심해서 선양하기 위한 노력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과제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제암리 사건에 이어 같은 날 같은 사람에 의해 감행되었던 고주리 참살사건까지, 20년간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념하는 조형물, 추모 공간 등이 마련되지 않고 있어요. 심지어 참살현장이 공장부지로 바뀌어 버렸어요. 사실 20년 동안 100년이 흐른 아픈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과물을 내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제가 경기3.1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당시 활동을 근거로 한 분이 이병헌 선생님이셨어요. 얼마 전 KBS다큐드라마에서도 이 분을 다뤘는데, 보성사에서 인쇄 일을 하시면서 3.1운동 당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독립선언 당시에 탑골공원과 연락책을 담당하셨던 분이세요. 3.1운동 이후 종로경찰서의 수배령이 내려지자 수원으로 피신을 합니다. 이 때 앞서 말씀드린 제암리 사건을 목격하죠. 수원으로 내려가서 모의를 하다가 일본 소방대에 집단구타를 당하고 이동하신 곳이 바로 제암리였습니다. 숨어서 제암리 주민들이 일본군 중위 아리타 등에 의해 사살당하는 장면, 이후 고주리로 넘어가 김흥렬 일가가 참살되는 장면까지 목격하시죠. 그 기록이 이병헌 선생에 의해 남겨져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분들,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천도교청년회는 그런 정신을 이어받아 활동의 폭을 넓혀 가고 있습니다.
저도 한 번 가 본적 있습니다. 아직 당시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자란 어르신 들 중 증언을 남겨주실 분들이 살아 계시더군요. 주재소 자리도 초등학교가 되어 남아 있고요. 천도교청년회 차원에서 구술 증언을 통한 학술연구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제안해 볼 수도 있겠군요. 지난 100년간 천도교청년회가 종교의 틀을 넘어 사회공헌 차원의 공적들을 찾아내는 일도 해야 할 일이겠고요.
이재선 : 맞습니다. 현재 천도교청년회 100년사 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편집위원들도 구성했고요. 80년사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도 많고요. 특히 지방사 부분에 대해서 또 신채원 선생님 연구하시는 관동대지진에 대해서도 빠져 있습니다. 일본 YMCA에 가보면 관동대지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1923년 당시 사건의 수습을 위한 YMCA, 천도교청년회, 또 학우회 청년들이 피해자 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역사도 80년사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고요. 누락된 역사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거든요.
시대가 변해도 한결같은 조금 독특한 한국사회의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는 ‘대를 잇는 신앙생활’과 가족공동체 문화가 만난다면 밝혀지지 않은 역사를 바로잡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근현대사를 연구하시고 족적을 남기신 분들의 상당수도 연구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그런 선대부터 이어져 온 필연적 운명을 받아들이신 것 같아요.
편집위원 선생님들, 그리고 저도 함께 고민하겠지만, 한분 한분의 역사가 청년회의 역사입니다. 100년사의 집필 방향은 차분하고 심도 있는 연구를 바탕으로 지난 100년을 우리가 오롯이 알 수 있는 100년사를 제작할 계획입니다.
천도교청년회 100주년 행사도 곧 앞두고 있죠?
이재선 : 그렇습니다. 오는 8월 31일 음악회 공연을 시작으로 10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선 천도교청년회장으로서 강조하고 싶은 사항은 행사를 앞두고 일주일간 재가기도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집에서 기도하고 마음을 모으는 과정부터 행사를 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천도교청년회장으로서의 내적 갈등이나 청년회가 나아갈 길에 대한 고민도 많으시겠어요.
이재선 : 지금 현재 천도교청년회의 근간이 되는 회원들이 지금 청년회가 해 온 일이 버겁게 느껴집니다. 선배들이 해 온 판타지에 가까운 신화, 업적을 따라가려는 노력들이 그야말로 목숨 걸고 했던 그 일들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따라갈 수 있을까. 대한민국을 생존해 간다는 것이 과거 선배들이 나라를 잃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것과 2019년 현재의 고민은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뒤 따라 가는 것이 본인들 스스로 소모품이 된다거나 존중받지 못한다는 자괴감도 생길 것 같고요.
청년들과 기성세대 간의 갈등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더 오래전의 과거에도 있었을 거예요.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100주년이 다가 왔는데, 행사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이 시점에서 기대하는 100주년 행사의 그림이 있나요?
이재선 : 올해 100주년은 선배들을 기억해 내는 과정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우리에게 판타지로 기억할 수밖에 없는 선배님, 선생님들을 우리가 잘 선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내년부터 이어질 천도교청년회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요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9월 2일 창립기념일을 맞이해서 기념식과 함께 부대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8월 31일 천도교대교당에서 청년회 축하음악회가 있고 기념식은 선배세대와 후배세대가 한 자리에 모여 세대를 아우르는 행사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100년의 역사를 담은 기록들을 마주하며 그 정신을 오늘날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가가 가장 큰 과제겠지요.
실천과제를 가지고 사회변혁운동의 과제를 가지고 방향을 모색하고 계시네요. 대한민국 100년, 새로운 100년이라는 과제. 어떻게 새로운 100년을 이어갈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이 있다면?
이재선 : 천도교청년회의 과제가 지난 100년에 대한 어떻게 매듭을 짓고 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내년, 내후년에도 천도교청년회로부터 펼쳐진 100주년은 계속 이어집니다. 개벽지 창간 100주년도, 어린이날 100주년도, 계속 이어집니다. 여성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천도교내수도단이 만들어지면서 우리 역사의 획을 긋는 여성운동의 시작이었거든요. 선양의 지점을 넘어 어떻게 새로운 100년을 열어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청년회 100주년 기념행사 이후의 계획도 궁금합니다. 또 개벽신문을 통해 천도교청년회장으로서 하시고 싶은 이야기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재선 : 100주년 이후의 계획으로는 회원들 간의 스킨십을 하기 위한 활동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많지 않은 청년회 활동가들이지만, 어느 조직이나 그렇듯 역할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참 귀합니다. ‘매듭’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천도교청년회가 100년간 해 온 수많은 업적에 대한 매듭을 짓고 이 시대의 새로운 정신 혹은 새로운 컨텐츠를 고민하고 발산시킬 수 있도록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개벽신문>을 통해 천도교 100주년 행사를 알릴 수 있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개벽신문>의 창간 정신은 천도교청년회가 꿈꿨던 바와 맞닿아 있습니다. 개벽의 정신은 청신간결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새롭고 허례허식 없이 간략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 그것을 붙잡고 천도교청년들이 추진해 왔던 것이 업적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새롭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나가는 과제가 지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동안 여러 자리에서 만난 인연으로 천도교인이 아닌 글쓴이에게 많은 도움을 준 이재선 씨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지면에 옮긴다.
조금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 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시대나 청년이 움직이면 시대가 직면한 절망을 넘고, 보편적 과제들을 극복합니다. 당장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는 다다르게 되잖아요. 천도교청년회가 굳건하게 100년을 걸어 온 것처럼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청년들은 때로 불가능한 꿈 하나쯤을 품고 있으며, 그런 불완전한 열정들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일어설 때 어제보다 오늘을, 오늘보다 내일을 밝히는 희망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