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국공 사태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에서 보안 관련 업무 종사자를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문제를 두고 '청년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이 문제는 분노하는 청년들이 말하는 (1)(채용과 정규직화에서의)공정성 문제인가? (2)가짜뉴스와 오해가 촉발한 해프닝인가? (3)해묵은 '(좋은) 일자리 부족'에 시달려 온 청년들의 화풀이인가? (4)왜곡된 사회 구조 속에서 뒤틀려 버린 청년들의 서글픈 자화상인가? 각자가 서 있는 위치와 중점을 두는 가치에 따라 의견이 엇갈린다. 심지어 기본적인 사실에 대한 체크마저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같은 사실을 두고도 이해하는 방식도 다르고, 평가도 다르며, 그에 따른 반응도 제각각이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의 직업관이나 취업 문제가 그 이전과는 다른 환경 조건에 놓여 있으며, 우리 사회가 이전과는 다른 체제로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지난번 '조국사태' 때의 청년들의 분노(조국-자녀의 입시 과정이 불공정했다고 보는 데서 오는)와 맥을 같이하는, 우리 사회에서 '공정성'이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이슈로 이야기될 수도 있다.
이 사태와 관련하여 이야기(글)를 하려 할 때 가장 곤란한 점은 분노한 당사자, 불공정의 피해를 입고 있다고 주장하는 청년들의 입장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지적하는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언론보도(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지만, 그중에는 팩트와 어긋나는 부분도 있고(알바생이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거나, 연봉 5천만 원 등), 분노하는 핵심 세력(인국공 공채 시험을 준비하는 구직자들, 그러나 이번 사태에 분노하는 이들이 이들만은 아닐 것이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안(채용 대상 범위 - 보안 직종의 특수성 등)까지도 있어서, 그들의 '분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들이 놓여 있는 객관적인 상황을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좀더 폭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대신에, 그러한 무지(분노하는 청년들의 객관적인 상황에 대한 필자의)를 전제로, 이번 사태에 관련하여 떠올린 나의 감상만을 이야기하는 데로 나아가기로 한다.
이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이미 "일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세대간 갈등" "아버지가 아들의 일자리를 뺏는다(정년연장 등과 관련)" 그리고 이른바 "조국사태"로 불리는, 공정하지 못한 스펙 쌓기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 등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태가 "무분별한 정규직 전환 청년 일자리 줄어든다"라는 피켓을 든 청년들과 오버랩될 때는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청년들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한 = 불공정한 전환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생각하는 '공정'은 그들 자신이 내세운 기준(공개 채용 시험)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서류심사(토익) - 필기 - 면접]. 이 사회의 과정들을 '(오지선다형) 시험'에 의해 평가하고 사정(査定)하는 것만이 '공정한' 것이라는 생각은 '낡은 것'이다.]
적어도 이 피켓만 놓고 보면, 지금의 청년들의 정서는 "통일이 되면, 가난한 북한 사람에게 우리가 그동안 애써서 쌓아온 부(富)를 나누어 주어야 하니, 차라리 통일 안 한 채로 사는 것이 좋다"고 한 '요즘 청년-학생들'의 생각이 그대로 묻어난다. "취준생 마상"과 "탈락자 마상(마음의 상처)"라는 말은 보는 이를 더욱 마음 아프게 한다. 누가 청년들을 저 절박하고, 구구한 세계로 내몰았는가?
(1) 해방 이후 오랫동안 '빽' '지인찬스'가 대기업 취직의 지름길로 여겨지던 시대가 있었다. 내가 어렴풋이나마 기억하는 건 70년대 이후지만, 그 이전은 오죽했겠는가?[그러나 그런 '인맥-취직'에도 이면은 있을 터. 구인구직 정보가 원할하게 소통하지 않는 시대에, 지인을 통해 (인간적 보증을 거쳐) 취직을 하는 것이 사용자 입장에서도 유리한 측면이 있는 경우가 그것이다. 마치 연애가 자유롭지 않던 시대에 '중매'가 성공적인 결혼의 한 방법일 수 있었던 것처럼. 이 말을 하는 취지는 한 시대의 상황을 오롯이 '현재'의 잣대로만 재단하면, 놓치는 것이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 시대에는 좋은 곳에 '취직'이 된다는 건,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오늘날의 의미에서 '정규직'이 된다는 걸 의미했다. 그 사이에도 '지인찬스'의 정점은 '학연(벌)' '지연' '혈연'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다.
(2) 다시 세월이 흐르는 사이, 이제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많은 시대가 되었고, 양질(?)의 일자리는 "하늘에 별 따기"가 되었다. '지인찬스'를 비롯한 '사적이며 비공개적인 채용'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 갔다.[이 또한 채용 관련 시스템의 전반적인 정비(채용공고-시험-면접)와 더불어 가능해진 흐름이다.] 한편으로 민주화(87) 이후로 30여 년이 흐르는 사이, 세대도 달라지고, 세상도 달라졌다. 이제 '민주'와 '정의'를 외치던 세대는 '낡은 세대'가 되었고, 그 아들딸들이 '일자리'를 두고 '무한경쟁'을 벌이는 시기가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일자리'를 배분하는 방식을 두고, 격렬한 다툼이 일어나고 있다.
(3) 오늘날 구직전선에 뛰어든 젊은이들은 세칭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가졌으나, 단군 이래 최고로 '좋은 일자리'에 들어가기 어려운 세대"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오늘의 젊은이들은 "단군 이래 처음으로 부모세대보다 가난하게 살아갈 세대"라고도 한다. 외부인이 이런식으로 얘기하는 상황에 처한 당사자(오늘의 청년들)들의 고통이 얼마마할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이런 정도로, 우리는 그들의 고통과 고난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반대로 그들(청년)은 "당신들의 우리의 고통과, 오직 '공정하기만을 바라는 우리 마음'을 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4) 여기서 드는 생각은, 만약 지금 청년들이 보이는 분노가 충분히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즉 행동에 나선 청년들이 침묵하는 다수 청년들을 대변/대표하고 있다면)[필자는 '분노하는 청년들'이 그와 같은 처지--구직--에 놓인 청년들을 충분히/올바르게 대변하고 있지 못하며, 이번 사태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판단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는 의심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의 분노는 정당한가' 하는 점이다. 필자의 '무지'를 전제로 이야기한다면, 필자의 느낌은 지금 일자리를 찾고 있는 청년들은, 현재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공정하지 못한 방법 혹은 공정하지 못한 스펙 대비 일자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지금의 그들은 선배, 선대 세대들과 비교할 때 엄청난 스펙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노오오오~력' 또한 그들보다 훨씬 더 강고하게 진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배 세대나 선대들이 비교적(?) 손쉽게 정규직의 자리에 올라선 그 혜택을 조금도(?)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은 '좋은 일자리'에 접근하는 방법은 "공채" 또는 "이에 준하는 방법"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이외의 것은 불공정한 것이 틀림없으며, 더욱이 현 정부는 촛불혁명 덕분에(?) 태어나서, 공정과 정의를 표방(약속)한 정부이기 때문에, 공정하지 못한 방법을 용인/채택하는 것에 대해 더 큰 분노를 느끼는 것 같다. 일종의 '배신감'이 더해진 셈이다. 그러니, 스스로 불공정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정당한 자기 권리 찾기이며, 마땅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5) 대개의 세상일이 그런 경우가 많듯이, 이번에 청년들이 보여주는 분노는 어쩌면 이번 사안 하나 때문에 촉발된 것은 아닐 터이다. 그보다는 오랫동안 '취업'을 향해 내달려 왔음에도, '좋은 일자리'에 '정규직'으로 취업될 가능성이 희박하고, 점점 멀어지고 있는 세태 전반에 대한 분노의 심정이 똬리를 틀고 있다가, 이번 사태를 분출구로 하여 터져 나온 것일 터이다. 이렇게 보면, 금번의 청년들의 분노를 잠재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며, 어쩌면, 영영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그것은 (4차 산업혁명의 진전 등과 맞물려) 청년들이 기대하는, 혹은 전통적인 기준으로서의 "양질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기만 할 것이라고 예측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일부나마 "양질의 일자리"에 취업되는 사람은 있을 것이고, 그들은 그때까지의 분노를 접고, 다시 정규직 내에서의 상승 투쟁에 몰두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또 다시 '공정성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겠지만, 똑 같은 '공정성에 대한 분노'라고 할지라도, 이미 '예비 취업생' 시절에 갖는 것과는 질과 차원이 다르게 마련이다. 그 시기에 '공정성에 대한 분노'라는 공통적인 키워드를 바탕으로 '예비 취업생'과 공감대를 넘어 '연대감'을 갖고, 나아가서 연대 투쟁(?)을 전개할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동안 진행되어 온 흐름을 보면, 그렇게 '어렵사리' 양질의 일자리에 들어간 사람들은 최대한 자기 울타리를 높이고 장벽을 치며, 다음 사람들의 진입을 막아나서는 길로 나아가곤 하였다.
이번의 사태가 예사롭지 않은 것은 지난 6개월 사이에, K-방역의 성공 등으로 모처럼 한국 사회에 자부심과 자긍심이 넘쳐나고, 우리가 "새로운 시대의 선진국"의 모범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넘쳐나던 분위기와 대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희망스런 분위기'에 착안하여 모시는사람들에서는 <세계는 왜 한국에 주목하는가>라는 책을 내놓았고, 현재 그 2편이 준비중이다.
그런데, <세계는 왜 한국에 주목하는가>라는 제목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한국사회에 충만한 자부심-선진국 예감 분위기에 대해 "국뽕" 운운하는 비판적인 목소리 또한 드높았던 게 사실이다. '국뽕론'을 주창하는 (건전한) 목소리 가운데는 한국사회의 문화적 행태나 사회적 관행, 그리고 개개인의 인식 수준(경향)에 개선의 여지가 너무도 많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웠다. ['세계는 왜 한국에 주목하는가'의 기획 취지는 이 지적에 반박하거나, 이러한 요소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K-방역과 그 이전에 K-POP, K-Movie 등의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따라가는 학습자에서 선도하는 창조자로"라는 핵심 슬로건 그대로, 더 이상 주눅든 모습으로 남의 뒤꽁무니만 쫓는 것보다 자신감을 갖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시대의 개막을 예고하는 글들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책('세계는 왜 한국에 주목하는가')를 낼 때부터 우려하였던 상황 중의 하나가 바로 지금 벌어지는 '인국공' 사태에서 청년들이 보여주는 행태들이다. 이것은 청년의 문제인가? 그보다는 한국사회의 문제이다. 그들의 부모가 종아리를 내밀며 '내 탓이오'를 외칠 문제이고, 나아가 그보다는 '기성세대 전체'가 자신들이 살아온 삶을 돌이켜보며, 무엇이 문제인지를 성찰해야 하는 사태이다. 그들의 의식이 좁아지고, 찌들어든 것은, 그들이 이른바 'N포세대'로 불리는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기 위하여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내놓는다는 것이, 편향된 언론의 사악한 시각에 오염된 것에 불과한 데 귀착하고 만 것은 이른바 '기성세대'의 삶 전체가 빚어 놓은 풍경이기 때문이다. [청년들에게는 이런 시각조차 '꼰대'스러울 것이다. 지금 그들은 (그들 생각에) '배려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몫을 빼앗지 말라'고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도 어쩌면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일들이 그러했듯이 우선 사악한 언론의 분탕질로 인한 흙먼지가 가라앉고 나면 잠잠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역시 대부분의 일들이 그러하듯이, 잠잠해진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는 (1)단기적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바람직하다는 대원칙에 대한 공감대의 형성 (2)그러나 '정규직화'가 '절대선'이 아니라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의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 (3)나아가 모든 직종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 더 궁극적인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 (4)수시로 새로운 직업이 생기고, 전통적인 일자리가 사라져 가며, 전통적인 일자리마저 그 내용과 형식이 급격히 변화해 가는 시대에 적합한 직업윤리가 필요하다는 점 (5)각자도생과 무한생존경쟁의 세태에서 공생과 상생과 배려와 연대가 더 중요하게 작동하는 사회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것 (6)생존과 생활이 최우선 과제이던 시대에서, 생명과 평화가 이상적일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생존과 생활의 유지를 위해서) 더 긴급한 과제로 다가오는 시대에서 '우리'가 사는 법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점 등을 생각하는 계기만은 놓치지 말고, 잊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의 분노'는 정당하다. '분노하는 청년들'은 아름답다. 분노 없이 청년기를 보낸다면, 행복은 사상 누각에 불과한 경우가 태반이다. 설령, 한때의 분노가 지나고 보면 부끄러운 경우였을지라도, 분노 없이 청년기를 보낸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 분노를 한편으로는 가다듬을 필요가 있을 때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폭을 넓혀서, 그리고 마침내는 더 구조적이고 근원적인 문제에까지 닿도록 하는 것이 '청년다운' 모습이다. ['다움'을 말하는 것도 '꼰대스런 일'이긴 하다.] 우리는 그것을 '개벽'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