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없던 시절이라 의지대로 밀고 나가긴했지만 속으로는 억수로 떨렸다. 지금은 그게 뭐 대수라고 정색하며 거절했을까 싶은데 그땐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라 투박하고 거친대로 성질머리를 표현했던 거 같다.
입사하여 일 년쯤 직장에 다녔을 무렵 남자 선배가 느닷없이 모든 팀원의 책상 청소 및 정리를 내게 제안했다. 입사 초기부터 부탁했다면 속으로는 거부감이 일었을지언정 막내니까 해야 되는 줄 착각했을지도모르겠다. 제안 시기가 적절치 않았고, 엉뚱했고, 갑작스러웠다. 퇴근 무렵 각자 정리가 부서(네 개 팀으로 구성)의 기존 질서였고 입사 후 내내 그렇게 해오던 건데 굳이 30분 일찍 출근해 팀원 모두의 책상을 혼자 정리하라는 것은 부당한 처사가 분명했다. 뭔가 미운털이 박혔든지 아니꼬운 게 생겼든지 막내를 제대로 부리지 못한 그간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수작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기분 좋게 봉사 정신을 발휘할 것이냐 불편을 감수하고 본심을 드러낼 것이냐 몇 초간 생각이 복잡했지만 이내 정색하며 거절 의사를 밝혔다. 만약 팀원 전체의 의견이라면 상당히 싹수없는 막내가 될 찰나였지만 그동안의 분위기로 봐서는 그 선배 단독 의견이거나 한두 명의 설득 정도는 있지 않았을까란 판단이 섰다.
나의 정색으로 갑자기 팀 분위기는 싸하게 돌변했고 나와 그 선배가 선 자리에만 특별 조명이 비추는 듯했다. 상대 선배는 화를 내며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했고 난 나대로 근무 외적인 일까지 요구하는 건 부당하다고 선을 그었다. 두 사람의 대치는 금세 부서 전체로 퍼졌고 내 맘은 하루종일 불쾌하고 불편했지만 성원하는 마음들 덕분에 힘낼 수 있었다.
보통은 '좋은 사람이야 괜찮은 사람이더라'고인정받기를 원한다. '피곤한 사람이야 모난 사람이더라'고 평가받는 건 굴욕적이라 뒤돌아서 욕할지라도 앞에선 괜찮은 척 표정 관리를 한다. 마음은 이미 정색하고 있는 데도 내색하기 힘든 이유는 좋은 이미지로 남고 싶은 욕구를 저버리기 어렵고자신과 다른 소수의 부정적 평가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정색은자신과 상대의 마음을 곤죽으로 만들 수 있다는 예측이 가능해 어지간하면 '통과'하려고들 든다. 단테를 원서로 읽어내라는 숙제를 받은 것처럼 불편함과 괴로움이 동반될 뿐만 아니라 관계 단절로도 이어질 수 있기에 대체적으로 본심을 제어하여 정색하기를 꺼린다.
웬만하면 터부시 한다는 그 정색을 실행한 이후 모든 이들이 '잘했다 옳았다'고 편들어 줄리는 드물다. 자세한 걸 알지 못하는 누군가는 '쟤 다시 봤어 수더분한 줄 알았는데'하고혀를 찰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자신의 정색이 옳은 것이었다 해도 이미지가 실추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감정을 숨기고 표정을 조절하는 일에 익숙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롯이 나를 응원하며 '잘했어 속 시원하다'고 호응과 격려를 보내는 이도 분명 있다.
그들의 호의가 있기에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도저히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상황이라면 정색에 도전하는 용기도 필요하다고생각한다. '좋은 게 좋은 거지'가 목구멍에 걸려 불쾌할 때는 싫습니다 아닙니다를 꺼내들 수 있어야 자신도 지킬 수 있고 수많은 허물도 바로 잡을 수 있다. 내 기분이 귀하니 알아달라며전부에게 호소하여 납득시킬 순 없지만 무조건 참을래로 일관하는 것은 소중한 나를 번번이 놓칠 수 있다. 물론 괜한 짓했다고 후회할 때도 있겠지만 못다 핀 꽃 한 송이로 남을 순 없지 않은가. 그럴 때는 깊은 성숙의 과정으로 삼으면 될 일이다.
누군가 나를 평가하고 규정하고 단정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나다움은 싸늘하게 식어갈지도 모른다. 지치지 않게 고장 나지 않을 만큼 때로는 자신을 위해 정색 좀 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