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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Oct 14. 2021

한 줄 혹은 두 줄

삶의 속도가 바뀌는 순간

한때는 매우 가깝게 느껴졌다가 때로는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대학 시절을 돌아보면 7할은 동아리가 채우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잡지 못했으나 어디로든 나아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던 때였다. 외로웠으나 외로움을 인정해 못하고 허영으로 나를 똘똘 감싸곤 했다. 내가 본능적으로 찾아 헤맨 것은 무위가 주는 안정감이었다. 동아리 사람들은 내게 무엇이 돼라 요구하지 않았고 현재의 내가 누구인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들과 어울리고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내딛으며 조금씩 무언가가 되려던 참이었다.


그땐 맨날 학관 동아리방에 처박혀 있었다. 거기에서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밥 먹고 과제하고 시험공부하고 때론 잠도 잤다. 동방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고 그들은 나와 어느 정도 결이 비슷한 학관인들이었기 때문에 하나 같이 지루하지 않았다.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했다. 어제와 똑같아 보이는 지루하고 따분한 나 자신에게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하루는 학관 화장실에서 낯선 물건을 발견했다. 그건 반쯤은 쓰레기통에 박혀 있었으나 나는 보자마자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나는 그것을 뽑아 들었다.


그건 누군가 사용한 임신 테스트기였다.

한 줄짜리.


쓰레기통에서 알지 못하는 이의 소변이 묻은 임신 테스트기를 꺼내 눈으로 확인하던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복잡했다. 언젠가 내게 다가올 일을 모의 연습이라도 하듯 떨리는 손으로 테스트기를 집어 들었다. 한 줄이 비임신이 맞는지 상자에 그려진 그림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긴장이 풀려 주저앉았다. 신이 의미하는 어마어마한 무게와 그 이후 바뀌게 될 알 수 없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몇 초간 경험했다. 아직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 그 이후 비로소 나와 비슷한 또래일 것으로 짐작되는 이 테스트기 소변의 주인공의 삶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나는 두 줄짜리 임신 테스트기를 손에 쥐게 된다. 낯선 공용 화장실이 아닌 집의 화장실에서. 바로 나와 소파에 한동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뜨기 전 새벽이었다. 건너 방에서 아직 잠이 깨지 않은 배우자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고개를 흔들어 내 숨소리에 집중했다.


막연히 생각한 언젠가가 다가온 것이다.


아직도 이유를 명확하게 댈 순 없지만, 난 원했다. 내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삶을. 언제나 걱정하며 아등바등 살아온 삶의 속도를 언젠가는 바꾸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언젠가가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나에게 묻고 있었다.


준비가 되었냐고.


희미하게 색을 바꿔가며 밝아지는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완벽한 때는 없다고. 아직도 두렵고 자신이 없지만 그 두려움의 실체 또한 없지 않나 생각했다.


아니다, 어쩌면 그 두려움에는 명확한 실체가 있었다. 다들 큰 소리로 제대로 얘기하지 않기 때문에 희미해 보일 뿐. 앞으로 나에게 다가올 몸의 변화, 출산의 고통, 그것보다 더 길게 이어질 돌봄이란 이름의 헌신, 그 시간만큼 멀어지고 잃어갈 것들. 직업적 안정, 내 삶에 대한 주도권 등 내가 포기해야 할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려움을 직시하고자 한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 내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은 내게 있으니 지금 여기서 다시 시작한다고. 그러고 나니 몸이 이완되며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나를 휘감았다. 그 알 수 없는 평온과 자신감으로 나는 임신 기간을 보내고 출산을 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삶. 내 돌봄 없이는 세상에 나갈 수 없는 아직 여리디 여린 생명과 함께 하는 삶.


반려동물은 커녕 반려식물도 제대로 키워 본 적이 없는 내가, 서로에게 깊이 의존하는 관계에 두려움을 느끼던 내가, 엄마가 됐다.


이건 무언가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듯 살아온 내가 한 생명과 함께 하며 조금은 변화해 가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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