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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Sep 14. 2022

사랑은 빨강이었던 적이 없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사랑은 두 존재의 만남이다. 우리는 두 원이 합쳐져 하나의 점으로 모여드는 하트의 형태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붉은 수줍음과 정열의 빨강을 사랑의 색이라 부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랑은 시간과 공간에 가깝다. 한 번의 운명적인 만남을 위해 무수히 여러 번 덧대어진 시간과 서로의 작은 마음들이 쌓은 견고한 무형의 공간. 그래서 어떤 사랑도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나 또한 내 존재가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시공간을 함께 만들 단 한 명을 찾고 싶은 마음에 매일같이 새벽을 지새운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새움으로 붉어진 마음을 달래던 중 닿을 수 없는 지척에서 고통이 들려왔다. 사랑이라는 목적을 안고 탄생한 세상에 밤이 내리면, 곳곳에 지독한 외로움과 미움이 돋쳐 있었다. 흑과 백이 서로 타협할 틈도 없이 다투고 있었다. 의문이 들었다. 사랑보다 고독과 증오를 더 가까이 안고 살아가는 흑과 백의 세상에서 우린 어떤 시공간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무엇 때문에 사랑을 사랑으로 두지 못하고, 어떻게 사랑이 미움이 되는 걸까? 붉을 줄 만 알았던 마음이 어느 순간부터 다른 색으로 바뀌는 걸까?


“사랑의 본질이 언제 왜곡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랑의 본질이 뭔데요?”


“따뜻한 마음의 근원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집 같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그 마음은 본질보다 기대에 가깝지 않을까요?

어디든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을 거라는

기대가 낳은 환상이요.”


빨강이 낳은 환상에 질문을 건넨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따스함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환영에 불과하다면, 사랑을 향한 이 마음이 오직 나를 위한 기만과 이기심인 것이냐고. 내가 가진 사랑이 작아서도, 당신이 나에게 주는 사랑이 볼품없어서도 아니다. 그냥 하나의 색으로는 불가능한 세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사랑은 시공간이라, 켜켜이 쌓인 흐름 속 뒤엉킨 모든 것들을 세세히 들춰보지 않는 한 규정될 수 없는 개인적이고 고유한 것이다. 잿빛으로 가득한 시대에 아름다운 빨강을 찾는다는 것은 흐린 비의 그늘 속에서 노란 햇살 한 줌을 잡는 일과 같은 걸까.


사랑은 항상 선명했던 적이 없어요.
이렇게 보면 그늘지고,
저렇게 보면 밝고,
시시각각 색을 바꾸기도 하고,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같은 마음도 항상 같다는 느낌이
아닐 때가 있잖아요. 상대방을 사랑하지만
그 깊이가 일정하지 않죠,
특정한 계기로 인해 더 깊어지기도
얕아지기도 하니까.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거죠.


그러다 넌지시 내다본 새벽 틈으로 빛을 타고 흐르는 빗줄기를 보았다. 회색의 물웅덩이가 흑과 백의 경계를 흐리며, 여기저기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곳에는 세상의 무게를 지탱할 바닥이 있었고, 호흡을 따라 내리는 차분한 소리가 있었다. 서늘한 습기 틈으로 안온하게 날 감싸는 공기가 흡사 사랑 같았다. 서로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흑과 백의 경계를 흐리는 것은 중간지대의 회색이다. 다채로운 색깔들을 품고 있지만 일관된 가능성의 영토. 흑과 백으로 규정되지 않는 모든 부유하는 것들이 있는 그대로 인정되는 구간. 세상의 우울을 향해 회색으로 걸어가면 왠지 누구의 마음이던지 위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우리가 사랑이라 여기는 것보다

그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이해하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어요.”


“그림자… 사랑이랑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행복해지는 것보다 슬퍼지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사랑의 빨간 표면보다

그 바깥의 회색을 아는 게 더 중요할지도요.”


아픔과 슬픔 없는 사랑이라는 허구의 가치를 찾아 외길을 달려가는 우리가 놓치는 회색이 얼마나 많을까? 왜 우리는 사랑의 단면만을 고집하며, 시리고 아린 그늘은 애써 무시하려는 걸까? 왜 이름 지어 규정될 수 없는 마음과 관계를 불안해할까? 느끼고 있는 본연 그대로의 감정, 타인과의 미묘하고 불완전한 거리를 있는 그대로 안아주는 것만으로는 사랑일 수 없을까?


그럼 애초부터 사랑은
빨강이었던 적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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