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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맹욱 Jan 25. 2024

첫눈

힐끔 단편선 - 010.

 나는 천천히 지상을 향해 내려가고 있다. 사람들의 눈이 보인다. 피곤함에 절은 눈부터 설렘이 가득한 눈까지. 그렇게 나는 딱딱한 땅에 내려앉는다. 사람들의 발이 보인다. 하늘 위에서 내리고 있는 눈들도. 누군가는 나를 발로 밟고, 혹은 차고 지나갔다. 재밌다는 듯이 웃는 소리도 들렸고, 땅이 꺼질 듯이 한숨 쉬는 소리도 들린다. 하늘에서 내리는 우리의 모습이 제각각이듯, 땅 위에서 살아가는 인간 또한 제각각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내 위에는 점점 더 많은 눈이 쌓여가고 있었고, 나라는 개념은 점점 사라진다. 그렇게 우리는 땅 위에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우리의 존재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물이 증발하면 수증기가 되고 그것들이 모여서 구름이 된다. 그리고 일정 무게가 되면 비가 되거나 날이 추우면 눈이 된다. 무한한 순환의 과정 속에 우리가 있는 것뿐이다.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어제 봤던 사람들보다 작은 인간이 걸어오고 있었다. 걷고 뛰고, 그리고 멈춘다. 그것을 반복하는 동안 뒤에는 조금 더 큰 인간이 따라오고 있었다. 작은 인간이 멈추면 큰 인간도 멈췄고. 작은 인간이 뛰면 큰 인간도 뛰었다. 그리고 이내 작은 인간은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작디작은 손으로 우리를 한 움큼 쥐고 큰 인간에게 보여주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너무 이쁘다고 말하는 작은 인간에게 큰 인간은 이렇게 말했다.     


 ”재이야. 우리 눈사람 만들어볼까? “    

 

 ”응! “


 작은 인간의 이름은 재이. 큰 인간의 이름은 엄마인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그들의 손으로 뭉쳐지고, 동그랗게 변해갔다. 한 덩어리를 만들더니, 또 한 덩어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를 잘 포개고 나서는 돌멩이들과 나뭇가지들을 주워와서 우리의 몸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눈사람이 되었다. 차가운 바닥에서 똑바로 서 있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재이는 즐겁다는 듯이 우리를 바라보며 웃었다.


 한참을 눈 위에서 뛰어놀던 재이는 이제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엄마의 말에 우리를 쳐다보았다.

      

 “눈사람 집에 데리고 들어가면 안 돼? 너무 추워 보여 엄마.”     


 “눈사람은 집에 들어가면 바로 녹아버릴걸? 추운 곳에 있는 게 쟤들한테는 더 좋은 거야. “

    

 ”그래도 언젠가는 사라지잖아. “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수 있는 거야. 꽃도 그렇고. 눈도 그렇고. 사라지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거야. “


 여자의 말에도 재이는 여전히 우리를 데리고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냉장고에 넣어두면 안 돼? “     


 ”그럼 거기 음식들은 어떡하게? “     


 ”내가 다 먹을게! 응? 잠깐만이라도 좋으니까 엄마. “     


 재이의 부탁에 여자는 조금 생각하더니 이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재이의 손이 다가왔다. 작고 따뜻한 손. 우리는 그렇게 냉장고라는 곳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춥고 얼음이 얼어있는. 매우 작은 공간 속에 우리는 꽤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엄마는 재이에게 눈사람을 너무 오래 꺼내두면 안 된다고 말했다.

 

 냉장고 안은 우리가 녹지 않게 도와줬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깜깜했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가끔씩 문이 열리고 무언가 들어오거나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엄마의 충고대로 재이는 가끔씩 냉장고를 열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꽝꽝 얼어버린 우리의 표면을 만지거나 꺼내서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안았다가 다시 냉장고 속에 넣어두었다. 재이가 우리를 안을 때면 따스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이 아이에게 오래 머물면 우리가 사라지는 것을 알면서도 왠지 모르게 그와 떨어지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재이를 기다리게 됐다. 매일 그는 우리를 꺼내서 표면을 만지고, 잠시 동안 안아주는 것을 반복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순간들 속에서 조금씩 존재의미를 찾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루는 재이가 아니라 여자가 우리를 꺼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 보는 장소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재이가 있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진짜 잠깐만이다..”     


 “응. 진짜 잠깐이면 돼. 엄마.”     


 그녀는 바닥에 우리를 내려놓았고, 재이는 천천히 일어나더니 이마를 우리에게 대었다. 그의 이마는 평소보다 뜨거웠다. 이마뿐만이 아니라 그의 몸 전체가 뜨거웠다. 따뜻한 방과 따뜻한 재이로 인해서 우리는 평소보다 빠르게 녹아갔다. 바닥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지만 재이는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재이와 만난 후로 우리는 사라지는 것이 가끔은 두려워졌다. 이전에는 사라지는 것 따위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원래의 장소로 돌아갈 뿐이지만. 하지만 이대로 사라지면 재이와는 다신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느낌은 도대체 무엇일까. 재이는 이제 괜찮다며 여자에게 우리를 다시 냉장고에 넣어달라고 말했다. 우리의 몸은 꽤 작아져 있었다. 재이는 전보다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차가운 냉장고 속에서 우리는 사라짐에 대해서 생각했다. 모든 것은 유한하고. 태어남과 사라짐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존재했다가 사라짐을 반복했고, 그것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재이를 만난 후부터는 사라지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단순한 눈. 감정 따위가 존재할 리 없음에도 그를 보고 있으면 무언가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무언가를 물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재이가 냉장고를 열 때만 세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샌가 밖은 차가운 겨울에서 봄으로, 그리고 여름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재이는 우리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에 우리를 놓아둔 채로 재이와 여자는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빛 때문에 우리는 빠르게 녹고 있었다. 균형이 점점 무너지고, 물이 뚝뚝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재이가 보였다. 재이의 눈에서는 조그마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오늘 사라질 것이 틀림없었다. 겨울에 왔던 눈이 여름에서야 녹는다고 하면 누군가는 믿어줄까. 우리는 또 이렇게 눈에서 물이 되고, 물에서 기체가 되고, 구름 속에서 만날 것이다.


 우리가 떠 있는 하늘 아래에 재이가 있었으면 좋겠다. 넓은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는 재이를 보고 싶었다. 아마 너는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것보다 많은 모습을 가지고 있겠지. 그리고 언젠가 다시 너에게 내려갈 때면, 아마 너는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지상으로 내려간다면 너에게로 가고 싶다. 너는 그때도 우리를 보며 순진한 표정으로 웃어줄까. 우리는 완전히 녹아서 물이 된 채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재이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뜨거운 햇살 아래 우리는 또 한 번 변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내 두둥실 몸이 떠오른다. 우리는 천천히 하늘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멀어지고 있는 재이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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