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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헌 Jun 24. 2016

6월 강릉

⑥ 사진 수집을 게을리한 개 주인의 푸념

강릉에 갔다. 송정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대관령 옛길, 물풀 빼곡한 남대천변, 테라스 활짝 연 안목항 카페. 6월 강릉이 왜 좋냐고 묻는다면 열 가지도 더 말할 수 있다.


아빠와 막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남대천으로 향했다. 단오 막바지라 붐볐다. 관노가면극, 단오굿, 널뛰기, 그네놀이 온통 구름 인파. 좁다란 인도를 걸으며 평창 한우 시식과 노점 맥주를 즐겼다.


천변을 걸었다. 한 손엔 500cc 맥주컵, 또 한 손엔 단오 안내서를 들고서. 그때 익숙한 풍경이 들어왔다. 앞서 가는 아빠와 나의 거리 2~3m. 2001년 이맘 때 벤과 단오장을 나섰던 장면이 불쑥 다가왔다.


10여년 전 6월 어느 주말, 남산 맞은편 단오장 입구에서 나는 벤의 목줄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기억 나는 것이라곤 고작 당시 장면 한 컷 그게 다였다. 어느 이유로 거길 갔는지, 뭘 봤는지, 요기는 했는지(꼬치라고 하나 먹었을 텐데) 거짓말처럼 아무 기억이 없다. 녀석과 같이 간 단오라고 해봤자 그 해 한 번이었는데, 하얗게 잊었다. 아니 통째로 날아갔다.


녀석을 기록하면서 알게 된 건, 쓰고 찍고 모은 게 참 없다는 거다. 기억도 증발했다. 기억 한 덩이, 사진 한 점, 일기 한 줄 없는 게 부지기수. 문장은커녕 단어도 없다. 뭐 한겨?


맥락이 없는 관계는 잊힌다. 6월의 남대천변에 서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녀석과 뛰놀던 강릉에서의 기억 다수는 시작도 끝도 흐리다. 한 주에 서너 번 약수터를 오간 것도 아빠였고, 친구들에게 벤을 소개시켜준 것도 누나였다. 이맘 때 벤은 엄마를 따라 강릉중앙시장도 여러 번 갔다. 고구마순, 비름, 질경이, 고들빼기 등 제출 나물을 사왔다. 하지만 나와 녀석의 추억은 서사는커녕 몇 줄 끄적임이 다다.


몇 피스 안되는, 기억이라는 퍼즐을 짜맞추려니 힘에 부친다. 기억의 복기랍시고 쓴 게 다 허구는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든다. 2001년 6월 산책을 마치고 흙투성이가 된 녀석의 발을 씻기고 사료 그릇을 채웠겠지 하고 짐작하는 게 다라니.


**며칠 전 서촌에서 미팅이 있었다. 일 얘기로 만난 30대 두 남자가, 그것도 초면에 10분 넘게 개 얘기를 나눴다. 그 분은 '살바토레'라는 부티 나는 이름의 개 사진과 영상 글을 보여줬다. 살바토레는 제 이름을 딴 페이스북 페이지도 있다. 유기견을 데려다 키운 지 2년이 넘었고, 매일을 페북에 기록했다. 사진, 동선(데이터, 인포그래픽 전문가인지라), 영상 등. 좋겠다! 살바토레.


많이 찍고 많이 쓰자.




벤과의 5600일 - 프롤로그

이야기를 시작하며


벤과의 5600일① 대낮의 실종

8월 땡볕, 가출, 도깨비풀


벤과의 5600일② 녀석의 간식들

천하장사 소시지


벤과의 5600일③ 벤과의 러닝

형, 이것밖에 못 뛰어?


벤과의 5600일④ 털 손질

탈모여도 괜찮아


벤과의 5600일⑤ 오줌 소탕작전

쉬, 가죽소파, 베이킹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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