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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노아 레인 Sep 24. 2024

스무 살 어느 청년의 아픔 속으로

그때를 아십니까?

 잠시 잊고 살다가도 "전쟁"이란 단어를 들으면

직접 겪어 보지 않았지만

물안개가 피어오르듯 잔잔한 아픔이 인다.


6.25,  한 사람의 일생과 그 가족들까지 아픔을 품고

살아가게 만드는 참혹한 전쟁.

세월이 흐른 지금, 그래도 참전용사들에게

"국가유공자"라 칭하고

그에 걸맞은 예우를 해준다니 참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자손들이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상황에서 그렇게 며느리인 내가 막연하게 시작하게 되었다.


서류 한 장 뗄 수 는 권한도 없지만  그저 남편을 통해서 들은 아버님의 평생의

아픔이 되어버린 그날의 이야기 외에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남편은 성인이 되면서 막연하게 아버지가 전쟁을 치렀던 그곳을 가보고 싶었다고 한다.

생전에 그곳 얘기를 자주 하셨고 나 또한 결혼하고 지금껏 수없이 들은 그날의 이야기다.

마음속으로 "그래 한번 해보자!"라고 생각한 것에 비하면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일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는 남편을 대신해

 다른 형제들이 나서주면 좋겠지만

어머님도 돌아가신 상황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왜 하냐는

그런 소리만 들릴뿐 아무도 한 사람의 아픔에는

 관심이 없었다.


난 그저 한 사람의, 스무 살 한 청년의 아픔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결혼하기 전, 이미 계시지 않았던 시아버님이 아니라 그저 스무 살 한 청년의

꿈도 많고 열정으로 가득 찬 그 나이로 말이다.

결국은 남편이 시간을 내어 서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준비할 서류가 많은지 웬만한

시집 한 권 분량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서류 준비 과정에서 드디어

군부대와 군번이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전투를 많이 치렀으면 가는 데마다

 승리를 했다고 해서

대통령까지 부대 이름을 그렇게 명명했을까?

아버님은 통신병으로 참전해서 3년 동안을 그렇게

 전쟁에 청춘을 바쳤다.

서류를 접수한 남편은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막연하게 말로만 듣던 그곳! 스무 살 청춘이

 길고 긴 전쟁을 치열하게

치렀던 그곳으로 발걸음은 이미 향하고 있었다.


북쪽으로 북쪽으로 내비게이션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간혹 까마귀 소리만 애절하게

들릴 뿐이고 군인들이 탄 지프차들의 행렬만이 보일 뿐 주변이 온통 산이다.

산 아래로 장교들 숙소인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건물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애처롭다.  다행히도 편의점 앞에 사복을 입은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컵라면을 먹기 위해 앉아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가  막연하게 부대 이름을 말했다.

맞긴 하는데 통합이 되어

20분 정도를 더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정말이지 더 들어갔다간 군사분계선과 맞닥뜨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안내받은데로 한참을 들어가니 위병소가 보였다.

헌병 두 명이 일사불란하게 차 옆으로 왔다.

하지만 더 이상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해서 우리는 인근  "꺼먹다리"로 갔다

내가 막연하게 써내려 갔던 그 "꺼먹다리"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 해마다 웅변 원고에 단골처럼 등장하던 바로 그곳이다.

그곳을 직접 보다니!!


그 시절 스무 살 청년은 입영열차를 타고 군용 트럭에

 실려서 이곳까지 온 것이다.

살아서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날마다 포탄과 총성으로 인해  밀려오는 공포감을

어떻게 견디며 살았을까?

순간 앵무새처럼 웅변대회 때마다 말로만 외치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남편 또한 말문을 잇지 못했고 한동안 우리는 먹먹한 가슴으로 둘러보던 그곳에 시간이 멈춰져 있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국가유공자" 증서가 왔다.

난 우편물을 개봉하는 순간 눈물이 앞을 가리고

스무 살 청년의 아픔이 느껴져 왔다.

그 치열한 3년간의 전쟁을 치르고 평생을 그 트라우마를 안고 살다 가셨다는

한 청춘의 일대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이제 남은 숙제는 전우들이 있는 그곳으로

 보내 드리는 일이다.

예우도 예우지만 그 치열한 전장 속에서 함께 한

 전우들과 영혼이나마 함께 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생각에 불과할 뿐, 정작 형제들이 뜻을 함께 하지 못해 호국원에 모시는 일은 무산되었다.


비록 결과가 그렇게 되었지만 산소에 갈 때마다

  비록 종이 한 장일지언정

아버님께 감사함을 전하는 일은 잊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지자체에서 관광코스로 개발해서

주변 경관이 많이 변했지만  단순한 관광이 아닌

아픈 역사를 다시 돌아보며

안보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왜 역사는 아는 만큼 보인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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