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백조모자를 쓰고 있었다. 3호선 경부고속철도역에서 내리기 위해 문 앞에 서 있었고 곧 문이 열렸다. 어떤 남자가 내가 쓰고 있던 백조모자를 살짝 건드려 비뚤어지게 만드는 바람에 발을 헛디뎌 발 빠짐에 주의하지 못했다. 지하철 아래로 휘청하고 다리가 빠져 들어갔다.
이후로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눈을 떠보니 세월이 흘러 지구는 얼음처럼 식어 매일 다섯 명씩 뛰어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루에 세 번 방송이 나왔다. 과학자들이 지구를 다시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싣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너무 추웠다. 삶을 지탱해 줄 식물들은 태어난들 곧 살얼음이 내려앉아 입 속을 차갑게 만들 뿐이었다. 복부가 시리고 아팠다.
현기증이 났는데, 그건 수분 부족이나 영양실조에서 온 것이라기보다 내 귀에 대고 이런 얘기를 끝없이 속닥대는 한 여자아이 때문이었다. 누워만 있던 나로서는 세상이 어찌 되었건 아는 체할 기력이 없었음에도 이 여자아이는 내가 꼭 알아야 한다는 듯 작은 입술을 내밀어 나를 살린 이야기, 세계 지리의 재편 같은 이야기를 내 귀에 쉴 새 없이 떠들어대서 귀가 간지럽고 피가 날 지경이었다. 어쩔 수 없이 눈을 뜬 이상 일어나야 했다.
잘 걷지 못했다.
여태까지 그런 것처럼 자고 싶었다. 눈을 감으면 낮인지 밤인지 구별할 필요가 없다. 틈만 나면 내 귀를 좋아하는 여자아이만 아니었더라면 쭉 그랬을 것이다. 절뚝거리는 몸을 끌고 지하철 위로 나가보았다. 듣던 대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얼어붙고, 춥고, 냉기가 가득했다. 소름 돋는 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눈을 뜬 이상 눈치가 보여 먹을 것을 구해보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과학자들의 연구소 앞까지 가게 되었다. 문은 쉽게 열렸다.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어느 방 한가운데 난로를 피우고 빙 둘러 서 있는 네 명의 과학자들을 보게 되었다. 손이 시린 지 난로에 손을 바짝 갖다 대고 몇 마디씩 주고받는 중이었다. 본능적으로 창문 아래 몸을 기대어 숨었다.
이 박사 어제 늦게까지 연구실에 있었다던데, 뭐 좀 알게 된 거야?
박 박사 음, 확실하지는 않지만 떠돌고 있는 소문에 힘이 좀 실릴 것 같아.
이 박사 무슨 소문? 그 백조모자설 말이야? 그런 괴상한 소문에 아직도 집착하는 거야?
박 박사 들어봐. B동에서 근무하는 김교수 알지? 그 사람이 확실한 증거를 발견했다는 거야. 그 증거만 확실하면 이 재앙도 끝날지 몰라.
이 박사 허허. 백조깃털이라도 발견했다는 건가?
김 박사 교수님, 무슨 말씀이세요? 백조모자설은 또 뭐고요?
최 박사 크크. 교수님들, 새내기 앞에서 농담 좀 그만하세요. 진지해졌잖아요.
김 박사 네?
최 박사 교수님들 맨날 하는 장난이야. 3년 전에 경부고속철도역에서 백조모자 쓴 사람이 발을 헛디뎌서 지하철 아래로 떨어졌는데.......
최 교수라는 여자가 무언가 중요하게 들리는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나는 현기증이 났다. 어지럽고 구토가 날 것 같아 입을 막고 재빨리 연구소를 빠져나왔다. 비틀거리며 간신히 지하철 아래로 돌아왔다. 여자아이를 보자마자 붙잡아 물었다. 여자 아이가 대답했다.
응, 그거? 선로 옆에 숨어 있던 블랙홀 사이에 네가 쓰고 있던 백조모자가 끼어서 땅이 얼어붙기 시작한 거야.
나는 너무 놀라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넌 왜 나랑 같이 있는 거야?
아빠한테 안겨서 네가 쓰고 있던 백조모자를 건드렸거든 내가.
바깥보다는 온기가 도는 바닥에 누웠다. 여자 아이가 내 귀에 과학자들이 노력하고 있으니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속닥였다.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