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을 기획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들에 관하여
기획자는 작가이다. 작가주의를 고수해야 한다. 또 기획자는 아웃사이더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기존의 세상을 부숴버려야 하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또 한편, 기획자는 철저하게 현실에 붙어 있는 존재여야 한다. 세상이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영역은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에서 시작한다. '서비스디자인' 이 나오면서 문화인류학적(Ethnography) 방법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통계적인 데이터에서 얻을 수 있는 직관이 가지는 한계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빅데이터'의 시대에도 충분히 '숫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UI를 넘어서 UX를, 총체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는 시대가 오진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기획자들에겐 '지적자본'이 중요하다. 데이터에 기반한 사고는 선행해야 하겠지만, 과감한 가설을 세우기 위한 접근이 필요하다. 기획자들은 그래서 사람을 관찰하며,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에게 동화되는 과정이, 책을 통해서 다른 '작가'들의 위대한 상상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진 않는다. 대다수의 기획은 Top-down 방식의 목적지가 있는 경우가 많고, 벤치마킹 대상을 카피하는 것에 그칠 때가 많다. 현실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기획의 케이스는 매우 적다. 그렇기 때문에 기획자들은 보통은 중재자(Moderator)의 역할을 주로 수행하면서 기존에 있었던 것들을 자신의 조직에 이식하고,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책 <오리지널스>에서는 그래서, 기획자는 또한 '신뢰자본'을 쌓아가야 한다는 뉘앙스를 전달해준다. 과격하게 요약하자면 조직 내에서 좋은 '정치가'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기획자가 속한 조직은 '기업'을 확률이 높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제한된 자원을 배분하여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야 한다는 지점에서 '정치'의 역할이 필요하단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기획자에게도 자원이, 인력과 시간, 자본이 충분한 경우는 없다. 때문에 이 기획이 왜 가능한가, 필요한가를 두고 끊임없이 싸워야 하며 불가능한 조직이라고 생각이 되면 그 조직 자체를 움직일 힘을 얻기 위해 우군을 얻어야만 한다. 그것이 '신뢰자본'이며, '지적자본' 이 현실로 이뤄지게 만드는 중요한 것이다. 피터 틸이 강조한 <제로 투 원>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나인 투텐', 즉, 일을 끝마치는 것에 매진하여 자신과 조직의 능력을 향상하고, '신뢰자본'을 쌓는 것이 필요하다.
기획자는 혁명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기획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매우 극소수의 것이며, 엔지니어, 발명가, 과학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일 확률이 높다. 기획자는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니고, 꿈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다. 그 현실을 더 퍼뜨리는 사람이어야 한다. 모두의 꿈을 모으고, 그것이 현실화되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을 조직하고, 그 조직이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서 마침내 그 결과물을 세상에 어떻게 더 퍼뜨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대단히 혁신적인 어떤 것들은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다. 기획자는 지금 세상에 붙어 있을 수 있는 혁신을 붙잡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어내야 한다. 때문에 기획자는 보다 더 넓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제품이 모든 것이라고 쉽게 말하긴 어렵다. 출시할 시기, 적절한 마케팅 그에 필요한 조직들에 대해서도 잘 꿰고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다시, 혁신을 꿈꾸는 기획자는 제 1 야당 당수쯤이 되는 정치가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기존의 체계에 대해서 반발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되, 그것이 급진적이지 않도록 조율해야 한다. 정권이 바뀔 수 있음을 고민하며, 기존을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따르지는 않더라도, 미워하지는 않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물론, 가장 급진적인 조직과도 연대하여 여당을 압박하는 기술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조직 내에서도, 조직 밖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조직 내에서의 방향성을 설정하기 위한 목소리를 높여야 하며, 조직 밖에, 조직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가지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도. 사이먼 사이넥이 말했듯,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낼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끈기가 있어야 한다. 버텨내는 것이, 부수는 것보다 더 많을 것이다. '지적자본'과 '신뢰자본'을 쌓아서 새로운 무언가를 내놓기 위해서는 기존의 시스템을 버텨내야 하고, 새로움에 대한 저항을 버텨내야만 한다. 또, 지금 보다 더 낫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맷집이다. 새로운 것은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안정성이 더 떨어질 가능성이 높으니까. 틀린 것을 수용하고, 더 발전하는 방향을 제시해내며, 종국에 기존의 것을 대체하는 것이 더 우위에 있는 상황이 될 때까지, 버텨내야만 한다.
이런 것은 어떠한 '기획(Design)' 에도 모두 포함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선생후숙 숙이후생(先生後熟 熟而後生), 버텨낸 다음에 부술 수 있다.
나도, 버텨내야겠단 생각이 들어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