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동해, 설악은

낙산, 설악

 한 해가 끝나갈  즈음 강원도 바닷가를 잠시 들렀다. 

11월 한 달을 이런저런 스트레스로 힘들게 보낸 탓에 겨울바다 곁에서 조금 쉬었다가

다음 먼 일정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재건축 후 처음 가보는 낙산사도 궁금하고 올해를 넘기는 의미의  일출보기도 

한 번쯤 해볼까 한 괜찮은 계획이었다.

가을 여행으로 설악과 함께 자주 갔던 동해바다는 나이가 들면서 겨울이 더 잘 어울리는 곳 같다. 

깊은 동해의 물살은 더욱 짙푸르게 변하고 설악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쨍하니 얼게 한다.

미루어 둔 겨울 해산물들은 또 얼마나 좋은가

나는 청정지역의 소라, 멍게, 해삼 이런 류를 잘 먹고 자란 어린 시절 탓에 항상 수도권의

이런 것들의 부재에 목말라 사는 편이다.

 늦잠을 잔 탓에 일출은 포기하고 오랜만에 느린  조식을 먹었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작은 호텔이지만 모든 것이 적당히는 충족되는 곳이라 옆 친구는 다음까지 기약한다.

 오래전 불교 신자인 동료들을 따라다니며 들렀던 낙산사 홍련암, 그 발아래로 마음을 빌던

낭떠러지를 보러 내려갔다가 쌀 한주머니 가만 올려놓고 나왔다.

이제 예전처럼 아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챙겨야 할 시점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나를 대신할 아들을 위한 사랑도 느낀다. 

정말 소중한 것들이 떠날 때는 섭섭하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지워 주던 무게감 때문에 한참 지나면

홀가분해져 있기도 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의 슬픔이나 아들의 성장 같은 것이 그렇다.

 거친 동해의 물살을 가르고 선 홍련암은 여전히 아름답고 비장하다.

이런 곳의 사계를 바라보며 수도했을 성현들은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싶던...

그래서 인간의 고뇌는 자연 앞에 서면 때로 덧없이 작아져 버린다.

 바닷가 곁 불상과 오래전 기억 속에 있던 낙산사 별채들까지 기분 좋은 차가움 속에 천천히 산책했다.

제법 익숙해진 지인들과의 동행이라 가식 없이 말하고 자주 웃게 되는 편이다

이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일을 찾아  떠날 것이다. 

  설악으로 올라가는 길은 공기가 청량해서 유리창 너머로도 그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얼어붙은 땅 위를 힘주며 걷는 발끝이 위태하지만 기회가 있을 땐 무조건 가야 하는 오가닉 산행...! 내려오는 길에 눈이 치워진 찻집에서 생강차 한 잔을 시키고 눈 덮인 설악의 한 자락을 보고 있으니

11월에 내리던 첫눈이 생각났다.

 기분이 좀 다운되는 날엔 운전대를 잡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기분에 맞는 음악과 함께 익숙한 길 위를 달리다 보면 눌러 둔 감정들이 홀가분하게 풀려나와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때로 울컥하는 기분을 휴지로 눌리다 신호등에 걸린 옆차 운전자의

관심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도 뭐 괜찮다.

 그날은 때늦은 사랑니 하나를 대학병원까지 가서 수술하듯이 뽑고 와 조금 번아웃 상태였다.

피 묻은 솜을 물고 잠들려 애쓰는데 넓은 거실 창밖으로 소리없이 쏟아지던 눈발...

12월도 되기 전 오는  첫눈이었다.

그 핑계로 마취도 안 풀려 부은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차를 끌고 나갔다.

이를 아프게 뽑은 것이 억울한 건 지, 눈이 빨개져 울었던 그즈음의 스트레스가 서러운 건 지 그날의 운전이 그랬다.

 추워도 아이스커피를 외치며 들어서던 다양한 국적으로 모인 듯한 옆자리 대학생들이 

허브 맛 나는 초콜릿을 건네준다. 인사를 하다 보니 뉴저지에서 온 여학생이 있어 반가웠다.

살얼음 낀 겨울 호수를  바라보던 오래된 목조 건물의 리조트.. 뉴저지의 휴양림 '모홍크'의 풍경이 잠시 스쳐갔다. 다시 한번 가볼 수 있을까 모르겠다.

또 한 번의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