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의 안진진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서도 내내 떠나지 않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모순의 안진진이 그러했습니다. (스포 있어요)
여러분은 모순을 읽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안정적인 나영규를 선택했으니 잘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왜 그를 선택했고, 그래서 행복했을까?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열어 안진진의 마음을 들여다봤습니다.
그리고 안진진의 마음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어린 안진진은 당차고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는 아이였습니다.
무언가 요구가 있을 때 가능하면 그 요구를 스스로 충족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다 하던 아이. 중학교 때 새 운동화가 필요하다던 동생을 위해 집을 나와 공장에서 두 달간 돈을 벌어 동생과 자신의 운동화뿐 아니라 엄마의 가죽구두까지 사서 금의환향을 하던 남다른 소녀였습니다.
그런 안진진은 어떤 어른이 되었나요?
문제는 여기에 있다.
어제도 우울했고 그제도 우울했었다. 삶에 대해 방관하고 냉소하기를 일삼던 나는 무엇인가. 단 한 번도 무엇에 빠져 행복을 느껴본 경험이 없는 나.. 무작정 손가락 사이로 인생을 흘려보내고 있는 나. 궁핍한 생활의 아주 작은 개선만을 위해 거리에서 분주히 푼돈을 버는 것으로 빛나는 젊음을 다 보내고 있는 나 - <모순>
똑같은 조건 속에서 출발한 쌍둥이 자매인 엄마와 이모의 너무도, 너무도 다른 삶을 바라보면서 자란 소녀, 그리고 행방불명에 이른 아버지. 불행을 짊어진 쪽으로 편입된 엄마와 자신의 삶을 보며 더 이상 스스로 인생의 요구를 해결하던 당찬 주체성은 없어지고 오직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삶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은 모두 거두어버렸습니다.
인생은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것 - <모순>
안진진은 이렇게 인생에 수동적이었고 열혈을 경멸하고 절대 감상적이고 유치하게 살지 않겠다며 느껴야 할 것들은 모두 적대적으로 걷어차버린 채 살아갑니다.
그러던 스물다섯 안진진은 자신의 삶이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이 너무나도 얇디얇은 삶이라는 것을, 우울한 나날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빨리 치유되기 위해, 아니 아예 다치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살아가다 보면 서른 살 즈음엔 파산에 이르게 돼서 아무것도 나누어 줄 것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영화 <콜 비 바이 유어 네임>에서 엘리오 아버지의 말이 떠오릅니다.
스물다섯, 마음의 파산을 한 안진진은 결심합니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내 삶이 이토록 지리멸렬해진 것을 모두 다 어머니에게 떠넘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의 인생에 있어 '나'는 당연히 행복해야 할 존재였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내가 내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 <모순>
그래서 결심한 일이 결혼. 급히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도 없지만, 결혼 말고 딱히 삶의 부피를 늘려줄 만한 일이 없습니다. 물론 사랑에 빠지지도 않았으면서 두 사람 중 하나를 선택하려는 것이 나쁘다는 것도 알지만 빈약한 인생을 걱정하는 안진진으로선 결혼도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충분한 검토를 거쳐서 어리석은 판단을 피해보리라 다짐하게 됩니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히 돌릴 것이다 - <모순>
최선이 아닌 차선책을 택할 수밖에..
그녀 앞에 두 명의 남자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철저히 계획해서 예측되지만 그래서 미래가 안정적일 것 같은 남자 나영규는 이모부를 닮은 듯 심심한 남자입니다. 반면 희미한 선 같은 남자 김장우.
오랜 관찰 끝에 그녀의 욕망은 김장우를 향하죠. 그 남자 앞에 서면 선명해지는 안진진은 그것이 사랑임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토록 자신의 생을 관찰한 그녀는 그를 선택하지 못합니다.
그 앞에서 선명해지는 마음과 정서적으로 자신을 꼭 닮아있던 이모의 마지막 선택을 보면서도 끝내 그를 선택하지 못하죠.
미워할 수 없지만 결코 닮을 수 없는 삶을 산 아버지, 타인 앞에서 자신을 번번이 놓쳐버리는 삶을 산 아버지처럼은 결단코, 결단코 살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에게 극복할 수 없는 타격일 테니까요.
온전한 행복을 찾고 싶은 욕망과 극복할 수 없는 아버지를 닮은 삶이라는 두려움 앞에서 그녀는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요? 그렇게 겨자씨 한 알도 심을 수 없이 얇디얇은 자신의 삶을 졸렬했다 느꼈는데 결국 사랑을 따르지 못하는 그녀가 가슴 쓰리게 안쓰럽더군요.
자신 안의 아버지와 김장우의 얼굴에서도 마주한 아버지, 그녀는 절대 선명한 마음을 따를 수 없었겠죠.
양감 있는 삶을 위해 그렇게 외쳤건만 이모에게 지옥 같았던 무덤 같은 평온일 수도 있는 그 선택이 그녀에게는 피할 수 없는 모순.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삶의 모순
그렇게 뜨거운 불구덩이인 줄 알면서 들어간 그곳에서 그녀는 잘 살고 있을까요?
그녀는 그 모순을 극복했을까요?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이모는 죽음으로 내게 가르쳐주었다 - <모순>
그녀의 삶이 행복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행복만큼 불행도 인생의 한 요소임을 아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큰 성장인 것 같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테니까요.
안진진도 그렇게 살아내고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크고 작은 선택들을 합니다.
그 선택이 핑크빛이길 바라며..
그러나 늘 옳은 선택만을 할 수도 없고, 안진진처럼 차선을 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는 건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상적인 미래와 초라한 현실의 간극에서 괴로움도 두려움도 초라함도 느끼며 살아가지만, 우리는 내가 한 선택을 옳게 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이기도 합니다.
비록 바라는 삶이 잘못된 선택으로 멀어 보일지라도 우리가 오늘도 그곳을 향해 한 발 나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모순이 아니지 않을까요? 다가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잘하는 것보다 잘하고 있다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오늘도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줄이는 여정 속에 있는 모든 분을 응원합니다.
우리는 모두 선택에 서툴고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그래도 잘하고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 <모순>
*양귀자 작가님의 말씀대로 이 소설을 부디 천천히..안진진의 마음을 따라가보며 읽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