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다크 나이트(2008)>의 내용과 결말을 포함하고 있으니 읽기 전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다크 나이트>는 DC 코믹스가 실사화한 배트맨 시리즈 중 하나로 히스 레저의 조커 연기가 인상적인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음지에서 정의를 수호하는' 다크 나이트(Dark Knight)와 대비되어 화이트 나이트(White Knight)로 불렸던 하비 덴트 지방 검사가 악당이 되는 과정을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비 덴트는 스스로 다크 나이트를 이어 양지에서 고담시를 청소하고자 하는 정의감에 불타는 검사입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배트맨이 부패하지 않을지 확신할 수 없을뿐더러, 배트맨 개인 능력에 의해 유지되는 정의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담시의 범죄자들을 기소하고 재판에서 줄줄이 승리한 하비 덴트를 위해 다크 나이트(브루스 웨인)가 '평생 돈 걱정할 필요 없어도 될 정도'의 펀드 레이징 행사를 열어주기도 한 것을 보면 브루스 웨인은 하비 덴트의 견해에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하비 덴트가 본인을 이을 후계자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여요. 하지만 조커는 하비 덴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여자 친구(레이첼)를 잔인하게 죽였고,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 하비 덴트는 악당이 되어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에 이릅니다.
2.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는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르며 문명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지면 서로를 잡아먹는 추악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의 가장 큰 목표는 사람들에게 이를 증명해 보이는 것이죠. ("They're only as good as the world allows them to be. I'll show you. When the chips are down, these, ah, "civilized people"? they'll eat each other.") 그리고 하비 덴트는 조커의 관점을 관철시킬 수 있는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정의감에 불타는 검사가 추악한 모습을 지닌 악당으로 변모했으니까요. 저 또한 조커의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하비 덴트가 악당이 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최진석 교수가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 썼던 다음 글을 참고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푸코가 보기에 근대인은 종속적 주체입니다. ... 외부에 있는 거대한 이념의 체계를 받아들여서 스스로 내면화한 후에, 그것을 자신의 원칙이나 기준으로 삼은 것에 불과합니다. ... 푸코가 말하는 능동적 주체는 어떤 외적인 가치나 원리에 기대어 살지 않아요. 자신에게 다가오는 외적 가치를 독립적으로 해결하고 자신의 도덕규범을 스스로 만들지요. ... "국민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랄지 "무거운 사명감을 안고 역사와 민족 앞에 섰습니다"랄지 이런 말은 더 믿지 마세요. 대신에, "나는 우선 이 한 몸이나 잘 건사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믿어 볼 만합니다." 최진석 교수의 표현을 빌린다면 하비 덴트는 '정의'라는 '외부에 있는 거대한 이념의 체계'를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며 그것에 종속되어 있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즉,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상황이 변함에 따라 하비 덴트에게 '정의'는 언제든 내동댕이칠 수 있는 가벼운 것에 불과했다고 보면 어떨지 싶습니다.
1+2. 브루스 웨인은 인간이란 한없이 추악할 수 있으면서도 선할 수 있음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비 덴트가 악당이 되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대해 때론 '진실이 훌륭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 것과 ("Sometimes ... the truth isn't good enough.") 조커에게 '누구나 내면은 추악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너의 생각은 틀렸다'고 말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죠. ("What were you trying to prove? That deep down, everyone's as ugly as you? You're alone.") 그리고 배트맨은 이를 바탕으로 능동적으로 자신의 도덕규범을 스스로 명확히 세운 인물이라 보면 어떨지 싶어요. 조커에게도 배트맨은 타락시킬 수 없는 존재이니까요. ("You truly are incorruptible, aren't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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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가장 소중한 것을 잃으면 제대로 된 정신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기 아주 힘들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하비 덴트가 악당이 된 이유를 그것으로 설명해도 충분히 설득력 있을 거예요. 하지만 어린 시절 부모님을 모두 강도의 총격으로 잃고도 악당이 되지 않은 브루스 웨인과 비교해보았을 때, 어쩌면 하비 덴트가 악당이 된 이유는 그가 능동적 주체가 아닌 종속적 주체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