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Joon Dec 30. 2023

쓰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하나의 글을 마치고 나면 상쾌하기보단 아찔한 기분이 먼저다. 써 내려오면서 거친 수많은 갈림길이 눈앞에 덕지덕지 남아 있으므로. 여기선 이쪽으로 흘러가 볼까, 저기선 저 단어를 쓸까, 이곳엔 어떤 조사를 쓸까, 저곳엔 형용사를 넣을까 말까, 마무리에 부사는 과하니 빼야지. 계산도 어려운 경우의 수가 복잡하게 모여 현재의 모양을 갖춘다. 마치 바둑을 두면서 다음 수에 가능한 여러 수 중 힘겹게 하나를 골라서 나아가는 것처럼. 정해진 하나의 길이 아닌 순간의 선택으로 폭, 경사, 풍경이 시시각각 변하면서 완결을 향해간다. 시작할 땐 미리 구상한 목적지로 걸어가려고 적지만, 어느새 예상치 못한 장소에 도착한 날 발견한다. 한 글자 한 글자 신중히 고르면서 지나왔더니 여기다. 지금, 이 글도 첫 문단이 이렇게 쓰일 줄 몰랐다. 쓰는 과정에는 무엇이 더 옳은지 모른 채 치열한 결정을 계속하는 고통이 따른다.


지루한 글을 쓰고 싶지 않다. 단 하나의 철칙을 고르라면 이거다. 흥미로운 소재, 입체적 인물, 기막힌 반전도 글이 지겹지 않게 돕지만, 그보다 먼저 쓸데없는 부분을 빼야 한다. 중요하다고 믿는 바람에 반복하느라 없어도 되지만 괜히 빼고 싶지 않은 내용. 한 말을 또 하는 걸 강조라고 포장하기 쉽지만, 진실은 숨어있다. 독자를 믿지 못해 조급하다. 핵심이라면 어련히 알아서 전달된다. 아닌 걸 여러 번 들이댄다고 될 일은 아니니까. 내 마음대로 쓰는 글인데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면 말리지 않겠다. 다만 읽고 싶은 사람이 없을 테니 일기장에 써두고 혼자 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읽는 사람을 떠올리지 않고 배려 없이 쓰인 글은 읽히지 않으니. 사실 바로 앞의 세 문장이 '없어도 되지만 괜히 빼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대세에 지장이 없는 무용한 유희의 현장이니 예시로 받아들이자.


가지치기가 심하면 엉성해져서 볼품이 없어지기도 한다. 글이 짧아지고 문장이 단출해져서 하고 싶은 말이 제대로 담기지 못한다. 곳곳에 흐름의 널뛰기가 발생해 매끄럽지 않다. 쓴 사람은 머릿속에 있지만, 읽는 사람은 당최 짐작할 수 없는 구멍이 보인다. 늘어지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독자와의 거리를 멀게 만든다면 패착이다. 굳이 핑계를 대기 위해 태어나며 저절로 얻은 급한 성격과 결론부터 말해야 하는 보고서에 찌든 지난날을 내밀어 본다. 어쩔 수 없는 체질과 경험은 서둘러 접어두고, 읽는 사람으로 빙의하여 빠진 부분을 깁는다. 전후 배경지식 없이 어제 태어난 사람도 글만 보고 어떤 이야기하려는 지 알 수 있도록. 나 말고는 모를 '전에 썼듯이'를 쓰지 않으려는 이유와 통한다. 상사에게 보고할 때 '전에 말씀드렸듯이'가 통한 적이 없다. 독자도 상사만큼이나 지금 읽는 글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인정하며 쓴다.


하나의 문장을 완성하면 고민이 마무리되는 게 아니라 시작이다. 다음 문장과의 거리를 정하는 새로운 괴로움에 휩싸여서. 너무 가까우면 중언부언이 실현되어 글자, 공간, 시간이 낭비된다. 너무 멀면 급격한 딴소리로 보여 정신을 놓게 만든다. 뻔하지 않지만 촘촘히 연결되는 적당한 거리. 틈을 주지 않고 적절한 속도감을 간직한 전개. 기름칠 된 톱니바퀴가 꼭 맞물리듯 돌아가는 모양. 지향하는 글이 갖춘 특징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쉴 새 없이 '다다다' 흘러가기 위해 문장 사이를 점검한다. 천천히 흐르면서 편안함을 주는 느린 글은 취향이 아니라 어렵다. 쓰는 나도 읽는 사람도 마치고 나면 살짝 헐떡거리는 글이 좋다. 숨도 안 쉬고 주르륵 읽었다는 평이 기쁜 까닭이다. 


글은 일직선이 아니다. 그랬다면 괜히 쓸 필요도 없거니와 썼어도 읽는 이가 없을 테다. 한눈에 훤히 보이는데 시간을 써 줄 착한 사람은 많지 않다. 생각지 못한 자극이 없다면 아무도 찾지 않는다. 쓰기와 읽기가 여가를 채우는 하나의 유흥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재미가 빠질 수 없다. 글의 맛은 전환에 있다. 편안한 이해 속에 안심하고 있을 때 다른 방향으로 틀거나 의외의 소재로 넘어가는. 더 보여줄 것 같아 기다렸는데 감질나게 돌아서서 가버리는. 반대로 속이 들여다보이고 원할 때 다 주는 사람이 매력이 적은 것처럼. 어디서 어떻게 어느 타이밍에 변할지 정해야 한다. 신나서 혼자 멀찌감치 나서면 누구도 데려가지 못한다. 지루해도 떠나고, 뚝 끊겨도 외면하는 게 독자다. 원하는 높낮이와 시선으로 끝까지 함께하려면 글이 달라지는 지점을 알맞게 심어두어야 한다.


말은 쉽다. 전부 염두에 두고 쓴다 쳐도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할 말이 없다. 간결하지만 의미가 빠짐없이, 처지지 않고 쫀쫀하게, 자유자재로 비틀며 쓰는 방법을 모른다. 정확히는 설명할 수 없다. 철저한 기획을 바탕으로 정신을 잡고 공들여 채워가지만, 어떤 원리와 방식으로 헤쳐 나가는지 표현이 어렵다. 바라는 대로 점점 나아지는 건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말해주니까. 둔한 중복이 사라지고 날렵한 움직임이 보인다. 쓰면서 벌어지는 머릿속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면 좋으련만. 꺼내 보일 수 없으니 보이지 않는 '감각'이라 할 수밖에 없겠다. 센스라고도 부르는 용어를 빌어야만 전달이 된다. 글을 쓴다는 건 감각의 영역이다.


흔히 '감각적이다, 센스 있다'라고 한다. 노래할 때, 운동할 때, 일할 때. 쓸 때도 마찬가지로 글 센스가 있다. 주변에 한 명씩 있는 밋밋한 주제도 맛깔난 입담으로 털어놓는 친구를 떠올려 보자. 호기심 넘치는 도입부, 과감한 생략, 눈치채기 어려운 복선, 예측할 수 없는 반전까지. 달라도 정말 다르다. 글쓰기도 다르지 않다. 기막힌 시작을 계획하고 빠져들게 할 장치를 마련한다. 주요 소재를 정하되 집착하지 않고 분량을 조절한다. 이쯤에서 필요한 부분을 빠트리지 않아 메시지가 흩어지지 않도록. 분위기에 걸맞은 시점을 찾아 끝내 버리는 결단을 내린다. 구석구석 빠짐없이 정해야 할 것투성이다. 결국 감각은 판단하는 능력, '판단력'이다. 쓰고 싶은 글을 쓰기 위해 글자마다 요구되는 온갖 상황을 파악하고 정리해야 한다. 의식의 흐름대로 흐리멍덩하게 쓴 글은 본인도 남도 휑하게 느낀다. 편하게 쓰인 글은 남는 것 없이 쉽게 잊힌다. 우리에게 인상을 남긴 글은 격렬한 갈등을 수없이 거쳐 나왔다.


감각을 타고난 재능이라며 겁먹을 필요 없다. 센스 없는 사람은 진작 그만둬야 하나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힘의 세계로 넘어온 이상 손에 쥘 수 있다. 힘을 기르려면 운동을 하면 된다. 운동을 다른 말로 하면 반복되는 연습이다. 모든 능력이 그렇듯이. 말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 어려운 '계속 많이 쓰기'를 나마저 또 뱉은 셈인데 조금만 참아 달라. 지속하기를 방해하는 건 결과의 불확실이다. 한다고 좋아질지, 얼마나 하면 되는지 알 수 없어서 지친다. 흔들릴 땐 제일 처음에 썼던 글을 읽고 오자. 쥐구멍과 이불킥으로도 모자라서 백업 불가능하게 영원히 지우고 싶은 첫걸음을. 그러고 나서 다시 최근에 쓴 글을 보자. 분명 달라졌다. 그만큼 감각이 늘었고 센스가 향상되었다. 알게 모르게 쓰고 고치며 터득했고, 적용해 다시 쓰면서 나아졌다. 쓰면 쓰는 능력이 길러진다.


잘 쓰기 위해 못 써도 써야 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아이러니. 오래도록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써야 는다. 머리론 알지만 마음은 외롭다. 맞게 가고 있는 건지, 어제 쓴 글과는 다른 건지 몰라서. 꾸역꾸역 쓰다가도 별별 반응에 휘날린다. 글이 좋다는 말에 설레며 하루를 보내고, 아무도 찾지 않아 조바심에 하루를 버리고, 원치 않는 평가에 허탈하게 하루를 비워낸다. 허송세월 하나 싶어 모른척하며 안 쓰다가도 마음이 헛헛해 다시 돌아와 쓴다. 쓰다 멈추다 또 쓰기를 꿋꿋이 이어가다 보면 믿음이 솟는다. 쓰면 써지는 기적을 향한. 어쨌든 앉아서 쓰기 시작하면 쓰게 된다. 쓰다 보면 내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나를 쓰는 체험을 한다. 생각이 글을 타고 흐르며 나름의 정돈을 통해 마지막 온점을 찍는다. 다만 아무렇게나 쓰고 싶지 않은 본능에 시달리는 통증은 피할 수 없다. 아프지만 산뜻한 중독 같은 과정을 기꺼이 겪어낸다. 쉽게 쓰인 글은 없지만 쓸수록 좋아질 확신은 쉬이 든다.


가끔 눈에 들어오는 '필력'이란 말을 보면 갖고 싶다. 글에 힘과 기운이 철철 넘쳐 드러난다니 굉장한 매력이다. 글을 쓰는 재주라는 놀라운 의미도 있으니 탐날 수밖에. 가질 수 없는 대상을 바라보며 신 포도를 포기한 여우로 둔갑한다. 어쩌면 필력이란 잘 쓰는 능력이 아니라, 멈추지 않고 써 내려가는 힘을 일컫는 게 아닐지. 당장 최고를 만들 순 없지만, 지금의 최선은 기를 쓰고 끌어낼 자신이 있다. 믿는 구석은 끙끙대는 시련 속에 길러질 감각이다. 원하는 글을 그려내기 위한 보다 나은 판단을 내려줄. 다행히 어디에도 정답은 없다. 맞았다는 안도도 없지만 틀렸다는 자책도 없다. 오로지 자신을 믿으며 취하는 고민의 연속뿐이다. 오늘도 쓰는 이유는 지금 잘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일 좀 더 잘 쓰려고 쓴다. 쓰지 않고 잘 쓸 리는 없다.




쓰지 않을 수 없어 쓰며 지은 책들




<글쓰기를 시작하며 읽으면 좋은 글 모음>






이 브런치는 이런 곳입니다.

이 작가와 책을 만나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