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확장과 리셋
흔히들 식견이 좁은 사람을 일컬어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한다.
너무나 흔한 말. 하지만 어쩐지, 아픈 말. ;
넓은 세상이 있는 줄 모르고, 그저 자기가 사는 좁은 우물 안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어리석음. 뭐 교육적인 측면에서야 당연히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치겠지만, 20년 차 월급쟁이 입장에서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면, ‘우물 안’만큼 안전하고 따뜻한 곳이 또 어디 있나 싶다.
매달 꼬박꼬박 물(월급)이 들어오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지, 가끔 위에서 돌멩이(상사의 갈굼)가 날아오긴 해도, 밖에서 독수리가 낚아채 가는 것에 비하면야 양반 아닌가. 그래서 우리 월급쟁이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이 우물 밖을 나가는 순간, ‘개구리 뒷다리 튀김’이 되거나, 말라비틀어진 명태 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런데 문제는, 이 우물의 주인이 나가라고 등을 떠민다는 사실이다. 내가 나가고 싶어서 나가는 게 아니라, 우물이 마르거나 주인이 방을 빼라고 하니, 우리는 기어이 우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겠다.
우물 밖으로 나간 개구리는 과연 얼어 죽을까? 아니면 새로운 연못을 찾을 수 있을까?
최근 들어 회사 밖의 사람들을 만나는 횟수를 조금씩 늘려보고 있다. 경영지도사 자격증을 따면서 알게 된 동기 분들도 있고, 새롭게 기웃거리고 있는 코칭 판에서 만난 분들도 있다.
재미있는 건, 이 ‘회사 밖’의 만남에서는 내가 지난 20년간 입고 있던 갑옷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회사 안에서야 “김 팀장입니다.” 하고 명함을 내밀면,
“아, 네~ 그 유명한 ㅇㅇ기업에 계시는군요.”
하며 일단 반쯤 먹고 들어가는 게 있었다.
내 이름 석 자보다 회사 로고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그 알량한 ‘후광 효과’ 말이다.
그런데 밖에서는? “아, 네.. 회사 다니시는구나.” 끝이다.
그냥 배 나온 40대 중반의 아저씨 1.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거기엔 은퇴하고 제2의 인생을 사는 전직 임원, 1인 기업을 운영하며 고군분투하는 청년 사장, 프리랜서로 글을 쓰며 여행을 다니는 작가 등등, 우물 안에서는 구경도 못 해본 ‘외계인’들이 우글거린다.
그들 사이에서 “제가 회사에서 전략기획을 했고, 보고서를 기깔나게 씁니다”라고 말해봤자, 돌아오는 눈빛은 ‘그래서요? 그걸로 지금 당장 얼마를 벌 수 있는데요?’ 하는 차가운 현실 감각뿐이다.
보고서 결재 라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오로지 ‘생존’과 ‘매출’로 증명해야 하는 야생의 세계.
처음엔 그 공기가 너무 낯설고, 솔직히 좀 무서웠다.
내 명함에서 회사 로고를 지우면, 나는 과연 무엇으로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김ㅇㅇ
이 세 글자만 남았을 때, 사람들은 나를 궁금해하기나 할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관심’이 묘한 해방감을 주기도 한다. 회사 직급이나 서열이 아닌, 온전히 ‘나’라는 사람의 매력이나 콘텐츠로 승부해야 하는 판. 계급장을 떼고 붙어보자던 학창 시절의 패기 같은 것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하는 것이다.
우물 밖의 개구리가 얼어 죽지 않으려면 방법은 하나다.
지금부터 창문을 열고, 바깥바람을 좀 쐬어야 한다.
우물 안의 온풍기 바람에만 익숙해져 있다가 갑자기 한겨울 삭풍을 맞으면 당연히 심장마비가 온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의도적으로 ‘이중생활’을 시뮬레이션 중이다.
낮에는 깍듯한 김 팀장으로 살지만, 퇴근 후나 주말에는 회사 명함이 없는 ‘자연인 김 씨’로서 사람들을 만난다. 거기서 내 말이 먹히는지, 내 생각이 팔리는지, 내가 가진 도구(컨설팅, 코칭, 글쓰기)가 회사라는 배경 없이도 교환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 테스트해 보는 거다.
물론, 쪽팔릴 때도 있다.
"아직도 회사 다니세요? 요즘은 딴 주머니 차는 게 대세인데."
하는 핀잔을 듣기도 하고. 하지만 그 쪽팔림이 예방주사다.
졸업하고 나서 겪을 거대한 막막함을 지금 조금씩 쪼개서 미리 겪는 것. 그게 바로 ‘우아한 졸업’을 위한 리허설 아니겠나.
우물 밖은 생각보다 춥다.
하지만 또 생각보다 넓다.
그리고 생각보다, 재미있는 놈들이 많이 산다.
그러니 쫄지 말자. 우린 20년이나 버틴 ‘독한’ 월급쟁이들 아닌가.
피하지방(뱃살)도 두둑하니, 웬만한 추위는 견딜 수 있을 거다. ㅋ
자, 이제 슬슬 우물 벽을 타고 올라가 볼까. 뒷다리에 힘 딱 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