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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저너리 Nov 11. 2019

[에세이 74] 어제 나는 부분적으로 죽고 말았다

[지원의 크루에세이04]지난 한 주, 예상치 못한 일이 있었나요


어제 퇴근을 마친 금요일 저녁,

2019년 11월 8일 오후 6시 23분에 나는 결국

나의 부분적인 죽음을 바라보고 말았다.


"이제 이 치아는 신경치료 마쳤구요. 다음주에 오셔서 크라운 씌우실 거에요~^^"


눈 앞에 벌어지는 일들 앞에서 입도 다물지 못한 채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은 없었고, 그렇게 내 왼쪽 어금니의 신경은 죽고 말았다. 신경을 제거하고 나면 그 치아는 더이상 세상의 뜨거움도, 차가움도 알지 못한채 점차 푸석해지게 된다고 하셨다. 곧 푸석해질 치아를 보호하기 위해 다음주에는 크라운이라는 이름의 관뚜껑마저 덮으며 신경치료는 끝이난다.


신경을 죽이면서도 이름은 모순적이게도 신경치료인 것이 신경쓰였지만, 치아관리에 있어서마저 남들에게 보여지는 부분만 잘 관리 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칫솔이 잘 닿고 눈에도 잘 띄는 앞쪽 치아들에 비해, 깊은 곳에 박힌 충치들은 그곳에 충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적당히 몇 번 치카치카 하고는 '나는 방치하지 않았어!'라고 생각하며 넘겨 버릴 뿐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이번에 이렇게 몇 회에 걸쳐 신경치료를 하면서 큰 돈과 시간을 지불해보니 이제라도 뭔가 해결책을 찾아보고 있는 중이고, 막상 이것저것 찾아보니 조만간 앞쪽 치아와 뒤쪽 치아의 양치 양극화를 줄일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 막을 수 있었는데 막지 못했다니.. 인간의 부주의로 참사가 발생하는 영화의 전개와 도무지 다를게 없었다.


건후와 달리 내 볼은 그저 퉁퉁부은 잇몸일 뿐이었다.


예상할 수 있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이번 신경치료의 시작은 이미 예기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3주 전, 누군가의 송별회 회식이 있었고 그곳의 음식이 문제였는지 나와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던 모두가 장염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중 나만 무려 보름가량 장염을 떨치지 못했고, 피부 알레르기까지 겹치게 되어 급히 휴가를 내어 병원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내과와 피부과를 모두 들르고도 시간이 남아 오랜만에 스케일링이나 받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치과를 방문하였다. 분명 가벼운 방문(?) 정도로 시작했던 곳인데 내 입 속에 노트북 한 대 값을 치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땐 꽤나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못들은 척하고 도망치기엔 엑스레이 사진을 비전문가인 내가 봐도 치료가 필요해 보였기에 그대로 예약을 잡고 본격적인 치과 방문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예상치 못한 스케줄이 발생하고, 지출이 발생하고, 치료에 따른 통증이 발생하게 되었지만 신기하게 차곡차곡 내 원래 계획들에 잘 끼워 넣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내 계획이 그렇게 촘촘하지 않았던 덕분인것 같다.


지금 이정도만으로도 '이제 그만!'을 외치고 싶지만 예기치 못한 채 발생하는 이벤트들은 참 많았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이러한 이벤트들이 내 계획과 일상을 방해하거나 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틀어진 방향이 내가 나아갈 방향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치과진료도 어차피 했어야 하는 것인데 언제 할 지를 안 정해두었던 것 일 뿐, 왼쪽으로 한 칸 앞으로 한 칸 가는 것이나 앞으로 한 칸 왼쪽으로 한 칸 가는 것이나 똑같기 때문이다. 다른 예기치 못한 이벤트들도 같다고 생각한다. 원치 않는 이벤트라 할 지라도 내 신경치료처럼 결국엔 마주 해야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예 새로운 이벤트라도 내 마음 속 어딘가에 '언젠가 해봐야지'라고 생각하던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그것이 언제 나타날지 타이밍을 몰라 계획하지 못했을 바로 그 뿐이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예기치 못한 일들을 즐기는 편이기도 했던 것 같다. 즉흥적인 감흥에 따라 움직이기도 하고, 기존의 선택과 계획을 과감히 틀어버릴때도 종종 있는 편이다. 어제만 봐도 그랬으니까.


여전히 같은 금요일 저녁,

치과 진료를 마치고 온갖 다짐을 하며 빠져나온 나는 그새 배가 고파서 마취도 안풀린 어금니에게 양해를 구하며 김밥천국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렇게 참치주먹밥과 치즈라면의 조합에 행복해하며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친구 녀석이었다. 무슨 일로 전화한건줄 바로 알 수 있었다. 왜냐면 다음 날 친한 선배의 결혼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할거란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받아보니 역시나였다. 다만 식이 열리는 위치가 울산이었는데 나는 서울 김밥천국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결혼식은 참석하지 못할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전히 라면을 입에 물고 통화를 했다. 그러다 뭔가 나도 모르게 홀린듯 친구에게 말했다.

"야, 갈까..? 갈래? 가자."


정말로 그 한마디 뿐이었지만 한시간 후 우리는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달렸다.

말꺼낸지 한시간만에 울산행 버스를 탄 우리는 그제야 현실감각이 돌아온 듯 했고, 나는 곧이어 그날 저녁부터 다음날 낮까지의 계획을 수정했다. 친구랑 같이 간 덕분인지 4시간반이 지루하지도 않고 갑작스런 울산행이 설레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날 예식장에 도착해서 반가운 형님의 세상 최고 멋진모습을 보니 참 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고 막상 마음먹고 와보니 방법만 찾으면 충분히 올 수 있는 곳이었구나 싶기도 했다. 심지어 계획없이 나온 것인데도 기존 계획했던 할 일들을 포기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그 덕에 정말 바쁜 주말이기도 했지만 그런것쯤 뭐 어때 하고 말았다.


누군가는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때 당황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침착하게 대하기도 한다. 해당 이벤트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다르기야 하겠지만, 어차피 발생했어야 할 요소라는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다.

출처: Naver Webtoon - '외모지상주의'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나를 당황시킬지, 또는 설레고 신나게 만들어줄지는 미리 분석할수도 예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 속 머피의 법칙처럼 '어차피 일어날 법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뿐 이라면 어제의 신경치료보다는 어제의 울산행 같은 일들이 더 많면 좋겠다.


출처: 영화 「인터스텔라」

(+) 어차피 했어야 할 치료라고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내가 좀 더 잘 관리해 두었다면 발생하지 않아도 될 이벤트였던 건 맞기에 슬쩍 다짐해본다.


 '어금니야 그동안 미안했고 앞으로 더 잘할게!'



비저너리의 크루 에세이 시즌 2부터는 비저너리 달력 뒤에 있는 그 달의 질문 중 하나를 골라한 주에 한 번, 월요일 아침, 크루들의 진솔한 답변으로 채워 나갑니다. :)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들도 바쁜 일상 속 생각에 잠기실 수 있도록 최근 한 달(4개)의 질문들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이번 한 주는 다음 질문 중 하나를 깊이 생각해보면서 어딘가에 답해 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요?


매일 나를 눈뜨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가요?

[에세이 73. 알람없는 하루]


•나의 죽음으로 세상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면 죽음을 택하실 건가요?

[에세이 72. 나는 우리가 살기를 바란다]


•죽음이 올때 당신은 어디에 있고 싶나요?

[에세이 71. 남겨진 이들을 위해]


•내 삶이라는 자서전이 있다면, 어떤 부분에 책갈피가 꽂혀 있을까요?

[에세이 70.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죽어요]



지난 한 주, 예상치 못한 일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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