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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Mar 09. 2016

색들의 각축장, 클림트의 풍경화

⑦ 빈 벨베데레 미술관

에곤 실레와 코코슈카를 지나면 클림트가 나온다. 클림트를 보기 위해 지나야만 하는 두 개의 전시실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단순히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에곤 실레와 코코슈카의 그림을 보면서 많은 에너지를 써야 했다. 우아하게 볼 수 있는 그림들이 아니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클림트의 전시실로 넘어갔다.


황금색을 기대하고 들어선 전시실은 초록색이 지배하고 있었다. 클림트의 그림들은 두 개의 전시실에 나눠서 전시 중이었다. 에곤 실레의 전시실에서 이어지는 곳에는 <키스>나 <유디트> 같은 클림트 특유의 황금빛으로 가득 찬 그림 대신 풍경화가 있었다. 클림트의 풍경화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던 나는, 우선 당황했고, 그러고 나서는 감탄했다.

<꽃이 있는 농장 정원>, 클림트.
<양귀비 들판>, 클림트.

클림트는 평생 동안 40여 점의 풍경화를 그렸다고 한다. 타탸나 파울리가 쓴 클림트 아트북에 따르면, 클림트는 분리주의가 창설되던 무렵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클림트가 풍경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인간 내면세계를 묘사하기 위해서였다. 클림트에게는 풍경화도 추상의 영역이었다.


캔버스 안은 색들의 각축장이었다. 초록의 대지에 붉은 양귀비 꽃이 도전장을 던지고 있었다. 푸른 들판 곳곳에 붉은 양귀비 꽃이 피어 있었고, 파랑과 보라, 노랑과 하양이 그 안에서 지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들판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았지만, 어디에나 있을 것 같았다.


클림트는 알프스 산맥에 있는 아터 호반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다고 한다. 클림트 평생의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에밀리 플뢰게가 그의 여름휴가에 동행했다. 클림트는 이 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풍경화를 그렸다. 풍경화는 평생을 치열하게 산 클림트에게 숨 쉴 수 있는 해방구였다. 그래서 클림트의 풍경화는 고요하고 잠잠하다. 그의 대표작들에서 느껴지는 치밀함이나 강렬한 힘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고요하고 잔잔한 호숫가가 채운다.

클림트와 에밀리 플뢰게.

시간이 멈췄다. 클림트의 풍경화를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의 풍경화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다. 클림트에게 자연은 한 순간이 아니라 영원이었다. 에곤 실레와 코코슈카를 보며 지쳤던 마음이 클림트의 풍경화 덕분에 회복됐다. 비로소 클림트의 대표작들이 걸려 있는 다음 전시실로 향할 힘을 얻는다.


에곤 실레, 코코슈카, 클림트로 이어지는 네 개의 전시실 중 마지막 전시실에 들어섰다. 전시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키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컴퓨터 모니터로만 접했던 키스는 생각보다 규모가 큰 작품이었다. 형형색색의 들판에서 키스를 하는 남녀는 황금빛 후광에 둘러 싸여 있다. 그림을 가득 메운 황금빛 장식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금이라는 소재가 주는 영원불멸이 두 남녀의 사랑을 더 빛나게 해주고 있었다.


<유디트>도 <키스>와 같은 전시실에 걸려 있었다. 유디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녀는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고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클림트의 그림 속에서 유디트는 황금빛 장식에 둘러 싸여 있다. 그녀는 홀로페르네스의 잘린 얼굴을 들고 있다. 가슴을 드러낸 채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디트의 얼굴은, 눈을 감은 채 연인의 키스를 받아들이는 <키스>의 여인과 대조된다. 같은 전시실에 걸려 있는 덕분에 두 그림을 마음껏 번갈아 볼 수 있었다.


<신부들>은 오스트리아 미술관에 있는 클림트의 작품들 중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다. 클림트가 말년에 그린 신부들은 에로틱하면서도 조화롭다. 키스나 유디트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인물과 배경, 장식이 어느 하나 과하지 않게 섞여 있다. 여러 여인들의 각양각색 표정은 그림을 더 풍부하게 해준다. 클림트가 죽기 직전에 완성한 그림인데도, 희망적이다.

부다페스트에서 빈까지 기차로 세 시간을 달려오고, 빈에 도착하자마자 벨베데레의 오스트리아 미술관에서 다시 세 시간을 보냈다. 에곤 실레와 코코슈카, 클림트의 그림을 전시한 네 개의 전시실에서만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허겁지겁 미술관의 나머지 전시실들을 둘러봤다. 벨베데레의 오스트리아 미술관은 클림트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걸작들이 많이 전시돼 있었다. 모네와 밀레, 고흐, 뭉크 같은 유명 화가들의 작품들이 곳곳에 걸려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모네의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빛에 천착한 모네의 그림은 앞서 본 클림트나 에곤 실레와는 달랐다. 하지만 그림에 담겨 있는 정신만큼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클림트의 풍경화나 모네의 그림이나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았다. 클림트에서 정점을 찍은 19세기의 예술 혁명은 모네에서부터 시작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스트리아 미술관에는 정말 많은 그림들이 있었지만, 늦어진 일정 탓에 아쉬운 마음을 다잡고 나와야 했다. 마지막으로 미술관 한쪽에 마련된 프란츠 사버 메써슈미트의 얼굴 조각상들을 봤다. 사람의 다양한 얼굴 표정을 포착한 조각상들이 한데 모여 있었는데, 그 익살스러운 모습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해가 저물어갈 무렵 미술관을 나왔다. 이따금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다음날 방문하기로 한 미술사 박물관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다.


벨베데레 오스트리아 미술관 http://www.belvedere.at/bel_en


프롤로그

여행의 가장 큰 걸림돌은 용기가 아닌 동기

① 부다페스트 밤의 풍경

야경을 아름답게 해주는 것은 빛이 아닌 어둠이다

② 부다페스트 키슈피파 레스토랑

글루미 선데이의 선율을 따라

③ 부다페스트 테러하우스

헝가리에게 히틀러와 스탈린은 현재진행형이다

④ 부다페스트 리스트 박물관

삶은 죽음을 향한 전주곡

⑤ 빈 제체시온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

시는 음악이 되고, 음악은 미술이 된다

⑥ 빈 벨베데레 미술관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 세기말을 그린 화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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