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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Mar 09. 2016

비포 선라이즈 사랑의 속삭임을 따라

⑧ 빈 프라터, CAFE SPERL

셀린이 말한다. "부모님은 내게 사랑이나 결혼 이야기는 한 적이 없어. 어릴 때부터 투철한 직업관만 키워 주셨어. 실내 장식가나 변호사 같은 것들. 아빠에게 '작가가 되고 싶어요'라고 하면 '기자가 되는 게 좋아'라고 대답하시고. '고양이 키우고 싶어요'라고 하면 '수의사가 돼라'고 하시고."


제시도 말한다. "어린 시절에도 지금처럼 마법 같은 순간이 있었어.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였는데,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문상을 갔었거든. 세 살 때였어. 뒤뜰에서 누나랑 놀고 있는데 정원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었어. 무지개 만드는 걸 하면서. 그러고 있는데 물안개 속에서 증조할머니가 보였어. 미소를 지으면서. 꽤 오랫동안 그녀를 보고 있다가 호스를 놓쳤는데 그녀는 사라졌어."

부다페스트에서 빈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제시와 셀린이 처음 만난다. 기차는 20년 전과 달라졌지만, 창 밖 풍경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부다페스트에서 빈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셀린과 제시는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창 밖으로 열차들이 나타나고 빈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열차장의 안내 방송이 들린다. 기차 문이 열리지만 제시는 없다. 제시는 짐을 들고 식당칸으로 향하고,  셀린에게 함께 내리자고 말한다. 셀린은 "가방 가져올게"라고 답하고, 그렇게 그들의 빈에서의 하루가 시작된다.


<비포 선라이즈>의 첫 장면을 잊지 못한다.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제시와 셀린은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대화를 시작한다. 정말이지 긴 대화의 시작이다. 제시와 셀린은 서로 읽고 있던 책을 덮는다. 셀린은 조르주 바떼이유의 <죽은 자>, 제시는 킨스키의 <원하는 것은 사랑뿐>을 읽고 있었다. 죽음과 사랑이 서로를 향하고, 그렇게 하루 동안의 대화가 시작된다.

대학교 1학년 때 이 영화를 처음 봤다. 수백 명이 모인 강의실에서 교수님은 다짜고짜 영화를 틀었다.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수업이었다. 처음에는 줄리 델피의 모습에 빠져 보다, 나중에는 제시와 셀린의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했던 기억이 난다. 그들은 빈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정말이지 많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사랑과 죽음이라는 큰 줄기 안에서 그들의 대화는 땅 아래 뻗어가는 잔뿌리 마냥 여기저기로 흘러간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 사랑의 순수성, 부부생활, 우연히 마주친 포스터 속 안개, 방황하는 인간과 종교가 주는 기쁨, 두 눈으로 찍는 사진. 이 많은 대화들을 나는 오랫동안 천천히 곱씹었다.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생각이 발전하기도 하고,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나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부다페스트에서 빈으로 향하는 기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다페스트에서 4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빈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비포 선라이즈의 여유롭고 고풍스러운 기차는 아니었다. 현대화된 기차에는 배낭 여행객들이 가득했다. 우리도 몸집만 한 배낭을 선반에 올리고 자리를 잡았다. 여행객들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끊이지 않았다. 영화에 나왔던 그 기차는 더 이상 없지만, 창 밖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영화를 통해서 스치듯 봤던 오스트리아의 초원이 눈 앞에 있었고, 구름 사이로 이따금 햇살이 내리쬘 때면 약간은 감격스럽기도 했다. 셀린도, 제시도 없었지만, 창 밖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주 동안 창 밖만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빈에서 머무는 3일 동안 셀린과 제시가 머물렀던 곳을 몇 군데 찾아갔다. 빈에 도착한 첫날 저녁 프라터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셀린과 제시가 해질 무렵 빈의 풍경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였던 대관람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비 내리는 늦겨울 놀이공원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대관람차를 타기 위해 온 관광객들만 이따금 보일 뿐이었다. 아이를 데려온 가족과 같은 관람차를 탔다. 관람차는 아주 천천히 움직였고, 빈 시내가 내려다 보일 정도로 높이 올라가자 한동안 멈춰 섰다.

프라터의 대관람차에서 내려다 본 빈 시내
프라터의 대관람차에서 내려다 본 빈 시내
프라터의 대관람차에서 내려다 본 빈 시내
대관람차에서 내려다 본 놀이공원의 모습
녹색 털모자를 쓴 꼬마 아이가 관람차에서 창 밖으로 보고 있다
프라터의 대관람차

관람차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영화와 비슷한 듯 달랐다. 형형색색 빛이 가득했던 놀이공원은 퇴락한 채 차가운 겨울바람을 견뎌내고 있었다. 사람이 찾지 않는 놀이공원에는 어둠이 더 빨리 내려앉았다. 반면 빈 시내는 영화에서 본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채색의 건물들이 안개처럼 낮게 깔려 있었다. 구름 낀 하늘은 매직 아워를 맞아 아름답게 변하고 있었다. 셀린과 제시가 사랑에 빠졌던 바로 그 하늘이었다. 꼬마 아이가 넋이 나간 듯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 이 꼬마 아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다시 관람차에 올 날을 상상해 봤다. 20년 뒤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제시와 셀린은 이 곳에서 키스할 때 20년 뒤를 상상이나 했을까. 그리스의 바닷가에서 서로 날 선 말을 주고받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대화는 때때로 관계를 악화시키기도 한다.


다음날 제체시온에서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를 보고 카페 스펄(sperl)에 갔다. 제시와 셀린이 늦은 밤 커피를 한 잔 마시기 위해 들렀던 곳이다. 카페 스펄은 영화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실내장식이며, 제시와 셀린이 앉았던 테이블이며 변한 것이 없었다. 영화 속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서 인지 단골 카페에 간 것 같은 편안한 기분도 들었다. 


때마침 평일 점심시간이어서 양복을 입은 직장인들이 많았다. 내 옆 테이블에 앉은 노신사는 간단한 식사와 커피를 주문하고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잘 차려입은 양복에는 주름 하나 없었다. 맞은편 테이블에는 젊은 직장인들이 샌드위치에 커피를 마시며 한참 이야기했다. 창가 자리에는 젊은 커플이 앉아 있었다. 남자는 테이블에 몸을 바짝 붙여서 여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카페 스펄의 외관.
영화에 나왔던 그 모습 그대로.
빈의 커피는 정말 맛있었다. 엔초비 샌드위치와 함께 했다.

셀린과 제시도 이 곳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으면서 사랑을 확인했다. 사랑은 대화에서 시작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대화는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할 때만 가능하다. 대화는 '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셀린과 제시는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있고 살아온 나날도 전혀 다르지만, 그들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에 빠진다. 만남을 통해 서로를 인식하고, 대화를 통해 다름을 인정하며 사랑에 빠졌다. 스무 살 강의실에서 비포 선라이즈를 보며 감탄한 것은, 아름다운 빈의 풍경보다 둘의 대화였다. 이렇게 완벽하게 서로를 이해하고, 또 이해하기 위해 저렇게 노력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에 빠져 영화를 봤다.

대화는 때때로 관계를 악화시키지만, 그 관계마저도 대화에서 시작한다. 셀린과 제시는 20년의 긴 세월 동안 외모와 성격, 말투, 행동까지 많은 부분에서 변화를 겪는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대화다. 셀린과 제시는 그들이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첫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대화를 나눴고, 10년 뒤 파리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20년 뒤 그리스 바닷가에서도 정말이지 많은 대화를 한다. 그 대화가 때로는 화살이 되어 상대방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도 하지만, 그들은 움츠러들기보다 다시 서로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부다페스트에서 만났던 그 강은 빈에도 있었다. 빈을 둘로 갈라놓은 강에는 거리의 시인이 있다. 도나우 강을 바라보며 시인이 셀린과 제시에게 건넨 시를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밀크셰이크>

허망한 꿈

리무진과 속눈썹

귀여운 얼굴에서

와인잔에 흘리는 눈물

저 눈을 봐라

그대는 어떤 의미인가

달콤한 케이크와 밀크셰이크

난 꿈속의 천사

난 환상의 축제

내 생각을 맞춰봐 추측은 말아

고향을 모르듯

목적지를 알지 못해

삶에 머물며

강물에 떠나가는 나뭇가지처럼

흘러가다 현재에 걸린 우리

그대는 나를, 난 그대를 이끄네

그것이 인생

그댄 날 모르는가? 아직 날 모르는가?


셀린과 제시의 대화 속에서 사랑이 자라나고, 그 대화 속에 사랑에 대한 진실이 있다.


"사랑은 혼자되기 두려운 두 사람의 도피 같아."

"마법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 있을 거야."


프라터 놀이공원 http://www.praterwien.com/en/home/

CAFE SPERL http://www.cafesperl.at/html/CSkap1.html


프롤로그

여행의 가장 큰 걸림돌은 용기가 아닌 동기

① 부다페스트 밤의 풍경

야경을 아름답게 해주는 것은 빛이 아닌 어둠이다

② 부다페스트 키슈피파 레스토랑

글루미 선데이의 선율을 따라

③ 부다페스트 테러하우스

헝가리에게 히틀러와 스탈린은 현재진행형이다

④ 부다페스트 리스트 박물관

삶은 죽음을 향한 전주곡

⑤ 빈 제체시온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

시는 음악이 되고, 음악은 미술이 된다

⑥ 빈 벨베데레 미술관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 세기말을 그린 화가들

⑦ 빈 벨베데레 미술관

색들의 각축장, 클림트의 풍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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