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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Mar 11. 2016

그림으로 쌓아 올린 박물관

⑨ 빈 미술사 박물관

빈 미술사 박물관은 미술관이 아니라 박물관이다. 그림은 감상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에 걸친 빈의 수집물로 보인다. 이 곳에는 다비드 테니르스의 <개인 화랑에 서 있는 레오폴드 빌헬름 공>이라는 그림이 있다. 특별히 상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 중인 이 그림은 미술이나 예술이 어떻게 소유의 대상으로 전락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비드 테니르스의 <개인 화랑에 서 있는 레오폴드 빌헬름 공>

다비드 테니르스는 17세기에 활동한 화가로 브뤼겔의 사위이기도 하다. 그는 브뤼셀에서 궁중화가가 되어 네덜란드 총독인 레오폴드 빌헬름 공의 예술품 관리를 맡았다. 이 시기에 다비드 테니르스는 레오폴드 빌헬름 공의 갤러리를 묘사한 그림들을 여러 편 그렸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 전시 중인 그림도 그중 하나다.


미술비평가인 존 버거는 이 그림을 '소유의 수단으로 전락한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레오폴드 빌헬름 공의 갤러리를 가득 채운 그림들은 그의 재력을 보여준다. 르네상스를 전후해 돈이 많은 이들이 그림을 사들인 것은 앎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시나 음악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레비스트로스는 "부유한 이탈리아 상인들은 화가들을 일종의 대리인으로 봤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리인으로서 화가들은 이탈리아 상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과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들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고 지적했다.

미하이 문카치의 <르네상스의 신격화>가 로비 천장을 장식하고 있다.
박물관 2층의 카페. 관람 중 휴식은 필수다.

존 버거는 여기에 부연해서 "1500년부터 1900년 사이의 유럽 미술이 자본이라는 새로운 힘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의존하고 있는 지배계급들의 이해관계에 봉사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재산과 교환 방식에 대한 새로운 태도는 다른 시각예술이 아니라 유화에서 시각적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시기에 유화가 유행한 것은 자본의 등장 덕분이다. 유화는 물건을 묘사한다. 묘사된 물건은 매매될 수 있다. 1900년을 즈음해 유화 시대가 끝나고 인상주의나 입체파가 득세한 것은, 유화보다 물건을 더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는 사진의 등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셀 수 없이 많은 유화들이 걸려 있는 빈 미술사 박물관은 자본이 허물 벗기를 한 동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빈 미술사 박물관은 경탄할 만한 체험의 공간이었다. 존 버거나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한 부분들을 감안하더라도 이 박물관에는 일종의 경건함이 서려 있다. 원작이 주는 감동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건함을 가지게 한다. 이 점은 존 버거도 이야기한 부분이다.


"원작에는 그 그림에 대한 어떠한 정보를 통해서도 느낄 수 없는 침묵과 고요함이 있다. 심지어 벽에 걸린 복제물도 이 점에서는 원작을 따라갈 수 없는데, 왜냐하면 원작이 지닌 침묵과 고요함이라는 것은 실제 물질 즉 물감에 스며 있어서, 보는 이는 그 물질성을 통해 화가의 몸짓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

빈 미술사 박물관에는 하루에 다 돌아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그림이 있다. 더군다나 그림 하나하나가 명작의 반열에 오를 만한 것들이라 훑고 지나갈 수도 없다. 교과서나 책으로만 봤던 원작 그림을 실제로 보다 보면 종종 전율이 일기도 한다. 


라파엘로의 <초원의 성모>도 그중 하나다. 라파엘로의 그림들을 전시한 곳에서도 초원의 성모는 단연 눈에 띄었다. 그림 앞에 소파가 마련돼 있었다. 검은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초원의 성모를 바라봤다. 계속되는 강행군에 지쳐있던 몸과 마음이 그림을 보는 동안 거짓말처럼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넓은 초원을 배경으로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모습은 보는 사람을 편하게 해줬다.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손으로 감싸고 있고, 아기 예수는 세례 요한이 쥐고 있는 십자가를 잡고 있다. 시선과 손길로 하나가 된 세 사람은 세상 그 무엇보다 단단해 보인다.

라파엘로의 <초원의 성모>

아기 예수와 세례 요한, 그리고 두 천사를 함께 그린 루벤스의 그림도 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림 속 아기들은 오로지 순수한 생명의 기쁨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는 빛, 장난기 어린 시선과 적의 없는 미소는 이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미술사 박물관은 모든 전시실마다 소파가 곳곳에 배치돼 있어 보고 싶은 그림이 있다면 앉아서 차분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라파엘로와 루벤스의 그림들은 하나하나가 놓치기 아쉬운 그림들이었고, 소파에 앉는 시간도 늘어났다.

루벤스의 <아기 예수와 세례요한, 그리고 두 천사>

브뤼겔의 그림을 모아 놓은 전시실은 미술사 박물관에서도 가장 충실한 공간으로 꼽힌다. 플랑드르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인 브뤼겔의 대표작이 전시실 하나에 다 모여 있었다. 그의 대표작인 <바벨탑>은 상상 이상으로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바벨탑과 공사에 참여 중인 사람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그림에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더해준다.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바벨탑은 그 크기 때문에 보는 사람을 더욱 불안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바벨탑은 곳곳에 유머가 가득했다. 공사 중인 바벨탑에 빨래를 말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공사 현장을 시찰하는 왕의 뒤에서 낮잠을 자는 사람도 있다. 


브뤼겔의 매력은 이런 세밀한 묘사에 있었다. <눈 속의 사냥꾼>이나 <농가의 결혼식>,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같은 그림에는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다.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의 얼굴과 몸짓이 워낙 생생해서 영화의 한 장면을 잠시 멈춰놓은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브뤼겔이나 플랑드르 회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 생생한 인물 묘사에는 흥미를 가질 것이다. 브뤼겔은 그 이전의 누구와도 비슷하게 그리지 않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었다. 화가의 우직함과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생생함이 하나가 돼 전시실을 풍요롭게 하고 있었다.

브뤼겔의 <바벨탑>
브뤼겔의 <농가의 결혼식>
브뤼겔 그림에는 인물과 풍경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브뤼겔 그림에는 인물과 풍경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브뤼겔 그림에는 인물과 풍경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브뤼겔 그림에는 인물과 풍경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미술사 박물관에는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그림이 있다. 램브란트와 뒤러의 초상화들, 벨라스케스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그림, 아르침볼드의 상상력 넘치는 그림들... 2층의 회화관만 이 정도이고, 1층과 3층의 전시실들까지 합치면 하루를 통째로 써도 다 보기 힘들 정도의 규모다.


특이한 것은 박물관 곳곳에서 실제 화가들이 전시 중인 그림을 모사한다는 점이다. 오래전 만들어진 그림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사람이었다. 위대한 화가의 그림도 삶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마르코 바사이티의 그림을 신중하게 관찰하는 어느 이름 없는 화가 덕분에 박물관의 수많은 그림들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이름 없는 화가들은 오로지 하나의 그림 앞에 오도카니 서서 몇 시간이고 그림을 그린다. 관람객들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앞의 그림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붓을 들었다가도 다시 내려놓고 벽에 걸린 그림을 다시 한참 동안 응시한다. 붓을 움직이는 시간보다 관찰하는 시간이 더 길다. 수백 년 된 그림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관찰이다. 누군가의 시선이 있어야만 우리는 생명력을 갖고 존재할 수 있다.

관람을 마치고 미술사 박물관을 나왔다.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이 광장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가는 곳의 대부분은 그녀가 통치했던 지역이다. 미술사 박물관의 수많은 명화들을 한 자리에 모은 데에는 그녀의 공이 컸다. 그녀의 동상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해가 쨍쨍한 맑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오늘 하루 보고 느낀 것을 가슴에 담아가기에는 적당한 날씨였다.

미술사 박물관 앞 광장의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

빈 미술사 박물관 http://www.khm.at/en/%EB%B0%A9%EB%AC%B8%EA%B0%9D%EC%95%88%EB%82%B4/


프롤로그

여행의 가장 큰 걸림돌은 용기가 아닌 동기

① 부다페스트 밤의 풍경

야경을 아름답게 해주는 것은 빛이 아닌 어둠이다

② 부다페스트 키슈피파 레스토랑

글루미 선데이의 선율을 따라

③ 부다페스트 테러하우스

헝가리에게 히틀러와 스탈린은 현재진행형이다

④ 부다페스트 리스트 박물관

삶은 죽음을 향한 전주곡

⑤ 빈 제체시온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

시는 음악이 되고, 음악은 미술이 된다

⑥ 빈 벨베데레 미술관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 세기말을 그린 화가들

⑦ 빈 벨베데레 미술관

색들의 각축장, 클림트의 풍경화

⑧ 빈 프라터, CAFE SPERL

비포 선라이즈 사랑의 속삭임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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