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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Mar 13. 2016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⑩ 프라하에서 읽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빈 중앙역을 출발한 기차는 한 시간여만에 국경에 도착했다. 빠르게 달리던 기차가 속력을 늦추는가 싶더니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을 꺼내어보니 체코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문자가 와 있었다. 창 밖 풍경이 아까 전과는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보헤미아의 들판이었다.

빈에서 프라하까지 기차로 가려면 제법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때문에 책 한 권을 준비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프라하라는 도시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사전 준비 중 하나가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은 것이었다. 기차에서 다시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전에는 훑어 넘기기만 했던 문장들이 새롭게 눈에 띄었다.


예컨대 소설의 첫 부분에 나오는 히틀러에 대한 소회가 그렇다. 

나는 어린 시절을 전쟁통에서 보냈다. 내 가족 중 몇몇은 나치 수용소에서 죽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이, 되돌아갈 수 없는 내 인생의 한 시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해 줬던 히틀러의 사진에 비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러한 히틀러와의 화해는 영원한 회귀란 없다는 데에 근거한 세계에 존재하는 고유하고 심각한 도덕적 변태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런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처음부터 용서되며, 따라서 모든 것이 냉소적으로 허용되기 때문이다.(10p)

나는 이 책을 조금 어렵고 철학적인 사랑 이야기로만 읽었던 것 같다. 토마시와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같은 인물들을 이해하기에 내 개인적인 삶의 경험이 미천했고, 그들을 짓누르는 역사의 무게를 가늠하기에 프라하는 너무 먼 도시였다. 하지만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보다 나 또한 나이를 먹었고, 이번 여행에서 동유럽 일대를 직접 둘러보면서 조금은 밀란 쿤데라의 생각에 닿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체코 국경을 지나니 테레자와 토마시의 귀국 장면이 떠올랐다. 그들은 소련의 점령군을 피해 스위스로 망명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프라하로 돌아온다. 테레자는 섹스와 사랑을 별개로 생각하는 토마시를 이해하지 못한다. 테레자는 그곳을 떠나고, 토마시도 테레자를 따라 프라하로 돌아온다.


토마시는 자신의 귀국을 설명하기 위해 베토벤을 인용한다. 토마시는 베토벤이 현악 4중주 마지막 악장에 적어 놓은 'Es muss sein!'을 되뇐다. '그래야만 한다!'는 다짐은 무겁다. 토마시는 테레자의 무거움에 굴복하고 체코 국경을 넘는다. 그는 끊임없이 그래야만 한다고 다짐하지만, 소련의 탱크를 마주하면서 다짐은 의심으로 변한다. 

그들의 사랑의 역사는 'Es muss sein!'이라기보다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그녀 때문에 보헤미아로 되돌아왔다. 이렇듯 치명적 결정은 칠 년 전 외과 과장에게 좌골 신경통이 없었더라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우연한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64p)

토마시의 사랑에 타격을 가한 소련의 탱크 행렬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보헤미아의 모든 길이 자기 것인 마냥 교통을 정리하던 흉측한 소련 전차병도 없었다. 프라하로 향하는 기차는 거침없이 달렸고, 창 밖으로 보헤미아의 들판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프라하에 가까워지자 자취를 감췄던 탱크들이 보였다. 기찻길 바로 옆의 낡은 공장 마당에 수십대의 탱크가 비닐을 뒤집어쓴 채 있었다. 탱크는 흉측하지도 위압적이지도 않았다. 생명력을 잃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탱크의 포신은 서로를 향해 엇갈려 있었고, 긴 겨울을 보내기에 거추장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토마시와 테레자를 절망으로 몰아넣었던 소련의 탱크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증오는 사라지지 않았다. 탱크는 낡은 허물을 벗고 현대화된 모습으로 탈바꿈했을 뿐이다. 토마시의 사랑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적들은 더 늘어나기만 했다. 이번 여행 내내 TV를 틀면 트럼프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CNN 뉴스 속 트럼프가 상징하는 모든 것이 사실은 토마시를 괴롭혔던 것들과 다를 바가 없다. 

사비나는 음악을 싫어한다. 그녀는 프란츠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란한 음악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말한다. "이건 악순환이야. 음악을 점점 크게 트니까 사람들은 귀머거리가 돼. 그런데 귀머거리가 되니까 볼륨을 높일 수밖에 없지." 사비나에게 음악은 인류의 추함을 상징할 뿐이다. 공산주의 행진곡과 자본주의 유행곡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공산주의, 파시즘, 모든 점령, 모든 침공은 보다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악을 은폐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악의 이미지는 팔을 치켜들고 입을 맞춰 똑같은 단어를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의 대열이었다.(169p)

프라하로 향하는 기차 안은 온갖 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행객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지칠 줄 모르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기차가 이따금 곡선 주로를 지나갈 때면 기차 바퀴의 쇳소리가 더해져 기차 안의 소리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어디선가 이어폰 밖으로 소리가 나올 정도로 크게 음악을 듣고 있었고, 이 와중에 전화통화로 사업 문제를 논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소리에 매몰되고 있었다. 사비나의 시대보다 지금이 훨씬 더 시끄러울 것이다. 사비나는 '소음화의 세계화'라고 표현하지 않았을까.


세 시간 동안 기차가 달린 끝에 도착한 프라하 중앙역은 기대와 달리 차갑고 황량했다. 플랫폼을 이어주는 지하 통로는 흡사 재개발이 진행되는 동네의 허름한 지하보도 같은 이미지였다. 마침내 역사를 나오자 눈 덮인 프라하가 모습을 드러냈지만, 질척해진 눈길은 불필요한 감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프라하 유대인지구의 공동묘지.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날 유대인 공동묘지를 찾았다. 빡빡한 일정 탓에 처음 계획에는 없었지만, 움베르토 에코가 죽었다는 뉴스를 듣고 도저히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를린행 기차 시간을 2시간 앞두고 토요일 아침에 서둘러 공동묘지를 갔다 왔다. 토요일 아침 유대인 공동묘지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쇠창살 사이로만 묘지를 엿볼 수 있을 뿐이었다. 비석들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군데군데 무너져 있었다. 바람에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묘지 곳곳에 흩어져 있어 쓸쓸함을 더했다. 좁은 구역에 1만 2000여 개의 비석이 서 있었다. 묘역을 늘릴 수 없었던 탓에 하나의 비석 아래 유대인 10여 명이 묻혀 있다고 한다. 10만여 명의 유대인이 묻혀 있는 작은 공동묘지였다. 움베르토 에코는 여기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이 공동묘지에서 무엇을 봤길래 <프라하의 묘지>를 썼을까. 이른 아침 공동묘지를 찾아 온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한참 쇠창살 사이로 공동묘지를 바라보며 움베르토 에코를 추모하고 발길을 돌렸다.

보헤미아의 공동묘지는 정원과 비슷하다. 무덤은 잔디와 생생한 빛깔 꽃들에 덮여 있고, 초라한 비석들은 짙푸른 나뭇잎 속에 숨어 있다. 저녁나절 공동묘지는 불 켜진 자그마한 초로 가득 차서 죽은 자들이 유치한 무도회를 여는 것만 같다. 그렇다, 유치한 무도회였다. 죽은 자들은 아이들처럼 순진무구하기 때문이다. 삶이 잔인했기에 공동묘지에는 항상 평화가 감돌았다.(174p)

프라하에서 머무는 4일 동안 토마시와 테레자, 사비나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화한 <프라하의 봄> 촬영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카메라 앞에서 배우들이 연기한 장소를 찾는 일이야 어려울 것이 없지만, 토마시와 테레자가 함께 느꼈던 슬픔과 행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프라하는 잘 정돈된 관광 도시였고, 사랑의 도시를 찾아온 수많은 연인들로 골목골목이 가득했다. 연인들은 프라하라는 도시에서 행복해 보였고, 그들에게서 토마시와 테레자의 얼굴을 찾을 수는 없었다.

빈을 출발하면서 책의 첫 장을 펼쳤고, 프라하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에 책을 덮을 수 있었다. 프라하에서의 3박 4일 동안 이 곳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해보려 했지만 이방인으로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는 밀란 쿤데라의 말에서 이들의 삶을 짐작해볼 뿐이었다.


프롤로그

여행의 가장 큰 걸림돌은 용기가 아닌 동기

① 부다페스트 밤의 풍경

야경을 아름답게 해주는 것은 빛이 아닌 어둠이다

② 부다페스트 키슈피파 레스토랑

글루미 선데이의 선율을 따라

③ 부다페스트 테러하우스

헝가리에게 히틀러와 스탈린은 현재진행형이다

④ 부다페스트 리스트 박물관

삶은 죽음을 향한 전주곡

⑤ 빈 제체시온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

시는 음악이 되고, 음악은 미술이 된다

⑥ 빈 벨베데레 미술관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 세기말을 그린 화가들

⑦ 빈 벨베데레 미술관

색들의 각축장, 클림트의 풍경화

⑧ 빈 프라터, CAFE SPERL

비포 선라이즈 사랑의 속삭임을 따라

⑨ 빈 미술사 박물관

그림으로 쌓아 올린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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