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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Mar 14. 2016

"맥주, 맥주!"

⑪ 플젠 필스너 우르켈 공장

위대한 음악가들에게는 뮤즈가 있었다. 쇼팽과 상드, 리스트와 다구 백작부인, 모차르트와 콘스탄쩨, 슈만과 클라라... 이 목록은 끝없이 이어진다. 음악가들은 그들의 연인을 위해 음악을 만들었다. 때로는 사랑의 상처가 위대한 음악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술도 빠질 수 없다. 압생트는 화가들의 술이었다. 고흐는 압생트를 마시고 귀를 잘랐고, 랭보는 압생트를 가리켜 "가장 우아하고 하늘하늘한 옷"이라고 노래했다. 헤밍웨이는 와인 샤또 마고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손녀딸 이름을 지었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직접 바를 운영했을 정도로 술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소설가 이외수는 "예술은 술 중에서 가장 독한 술"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술에 대한 이해도 반드시 필요한 셈이다. 그래서 맥주공장으로 갔다. 프라하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일찍 필스너 우르켈의 본사가 있는 플젠으로 향했다.

플젠은 프라하에서 기차로 5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도시다. 체코의 대표적인 공업 도시인데 일반인들에게는 필스너 우르켈로 더 유명하다. 플젠은 필스너 우르켈이라는 브랜드가 탄생하기 전부터 수많은 맥주 양조장이 있는 도시였다. 플젠의 물과 홉이 맥주를 만들기에 최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맥주의 질이 점점 떨어졌다. 결국 1833년에 플젠 지역의 100여 개 양조장이 모여 맥주 질을 높이기 위해 공동으로 생산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여기서 필스너 우르켈이 탄생한 것이다.


필스너 우르켈 공장은 플젠 중앙역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모처럼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걷다 보니 금세 공장에 도착했다. 늦겨울 평일 오전에 맥주 공장을 찾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10여 명 남짓한 사람이 영어 투어를 신청했고 90분 동안 함께 움직였다. 투어 시간이 조금 남아 기념품 가게에 갔다. 필스너 우르켈 로고가 새겨진 각종 음주 용품이 가득했다. 작은 잔을 하나 사고 투어 대열에 합류했다.

투어는 방문자 센터(visitor center) 2층의 작은 역사관에서부터 시작했다. 가이드는 필스너 우르켈 공장의 탄생 과정을 몇 가지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플젠 지역에 있던 100여 개 양조장이 공장을 짓기로 결정하고, 이를 행동에 옮긴 과정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짧은 설명이 끝나고 밖으로 나가니 투어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공장 안으로 이동했다.


공장 안에서 처음 방문한 곳은 맥주를 병과 캔, 페트에 삽입하는 공정이었다. 공장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진한 향기가 가득했다. 코 끝을 찌르는 강렬함이라기보다 건물 구석구석을 스멀스멀 메운 것 같은 구수함이었다. 병입 공정은 2층 유리 복도를 통해 구경할 수 있었는데, 이 공정은 한국에서도 맥주 공장을 갔을 때 몇 번 봤던 장면이었다. 수많은 녹색 유리병이 줄지어 이동하는 장면은 장관이었지만 공정 자체에 대한 흥미는 떨어졌다.

병입 공정을 둘러보고 나오면 다른 건물로 들어간다. 본격적인 투어의 시작이다. 72명이 한꺼번에 탈 수 있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간단한 소개 영상을 봐야 한다. 관람객이 중앙에 모여 있으면 둥그런 방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공장과 맥주 생산 과정을 설명하는 영상이 나온다. 영상이 생각보다 재미있었던 기억이다.


다음으로는 맥주를 만들 때 사용하는 맥아를 직접 만져보고 맛볼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조리되지 않은 맥아를 처음으로 먹어봤는데 굉장히 고소하고 부드러워서 깜짝 놀랐다. 아침식사를 하고 시간이 한참 지난 터러 나도 모르게 한 움큼을 집어 먹었다. 맥주를 만들 때 사용하는 이스트나 플젠의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물도 직접 구경할 수 있었다.

한 웅큼 집어 먹었다.

계단을 조금 내려가자 공기가 후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이드를 따라 두터운 문을 몇 개 통과하자 거대한 증류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맥주를 발효시킬 때 사용하는 증류기였다. 높은 온도 탓에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땀이 날 정도였다. 바로 옆에는 과거에 사용했던 증류기를 없애지 않고 그대로 남겨 뒀다. 설명은 구 증류기 옆에서 이뤄졌다. 모니터를 통해 맥주 발효 과정을 상세하게 볼 수 있었다.


다음 코스는 공장 투어의 하이라이트인 지하 저장고였다. 실제 맥주통이 보관 중인 지하 저장고로 들어서자 증류기 공정과는 달리 서늘함이 느껴졌다. 맥주를 보관하기 위한 적정 온도가 5도라는 설명을 들었다. 나무와 돌로 이뤄진 굴 안으로 계속 들어가자 거대한 맥주통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지하 저장고는 좁은 통로와 넓은 통로가 반복해서 이어졌는데, 흡사 경주 방사성폐기물 처리장을 갔을 때와 비슷한 느낌도 들었다. 그만큼 지하 저장고는 고요하고 길었다.

맥주를 담은 거대한 오크통에는 생산 년월일이 표시돼 있었다. 계단 위에 올라서자 하얀 거품이 올라온 맥주를 볼 수 있었다. 90여분에 이르는 공장 투어도 막바지였는데, 이쯤 되자 마음속으로 "맥주, 맥주."하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마라톤을 할 때 마지막 5km를 남기고는 "맥주, 맥주."하면서 뛰었다고 한다. 나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맥주를 보관하는 곳 한쪽에 플라스틱 컵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제일 앞에 서서 큰 컵을 받아 들었다. 나이가 지긋한 공장 직원이 오크통에서 직접 맥주를 따라 주었다. 여기서 마시는 맥주는 살균을 하지 않은 것이다. 공장 밖에서는 마실 수가 없는 맥주이니, 한국에서 아무리 보관과 관리가 잘 된 필스너를 마셔도 다시는 이 맛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가이드는 와인을 시음할 때처럼 맥주도 세 가지를 확인하면서 마시라고 조언했다. 일단 맥주잔을 빛에 비춰보아 색을 확인해야 하고, 그다음은 향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입에 한 모금을 머금고 그 맛을 즐기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감격스러운 마음에 한 모금을 들이켰다가 뒤늦게 가이드의 말대로 했다. 빛에 비춰본 필스너는 세 가지 색이 층을 이루고 있었다. 가장 밑에는 노오란 금빛이 가득했고, 중간 부분은 거품이 섞이면서 약간 갈색빛을 띠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상층부는 하얀 거품이 섞여 한층 밝은 금색이었다. 그야말로 골든라거였다.

맥주 공장 전체는 맥아와 홉의 냄새가 가득한데, 막상 맥주에 코를 가까이 대자 향긋한 기운이 몰려왔다. 입에 맥주를 머금자 살아 있는 알갱이들이 입 안 곳곳에서 톡톡 터지는 느낌이 났다. 살아 있는 맥주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순간이었다. 가볍게 남아 있는 맥주를 한 번에 들이키고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했다. 


이렇게 맛있는 맥주를 마시는 날이 오다니!


체스키 크룸로프와 플젠을 놓고 고민했던 순간이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이 맥주를 마시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왔다면 동유럽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필스너 우르켈 공장 투어 http://www.prazdrojvisit.cz/en/


동유럽은 물보다 술이 싸다. 음식도 한국인 입맛에 잘 맞기 때문에 레스토랑을 한 번 가면 음식과 맥주를 쉴 새 없이 시키게 된다. 이번 여행에서 좋았던 식당을 몇 군데 적어본다. 맥주는 공통적으로 맛있었다.


1. menza(부다페스트)

=테러하우스 근처의 식당. 깔끔하고, 음식 맛과 서비스가 좋다.

2. kispipa(부다페스트)

=글루미 선데이를 만든 레조 세레스가 피아노를 쳤던 레스토랑. 헝가리 전통음식을 비교적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

3. hinterholz(빈)

=립을 전문으로 하는 레스토랑. 립의 양이 제법 된다. 가격은 약간 비싼 편. 한국인이 굉장히 많다는 점이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다.

4. na spilce(플젠)

=필스너 우르켈 공장 안에 있는 레스토랑. 공장에서 직접 운영하기 때문에 맥주는 단연 최고고, 음식도 굉장히 맛있었다.

5. hofbrauhaus(베를린)

=맥주 주문을 리터 or 하프리터로만 한다. 맛은 당연히 훌륭하다. 체코나 헝가리와 달리 흥겨운 분위기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시종일관 웃고 떠든다. 음식도 좋지만 분위기가 더 좋은 곳.

6. lindenbrau(베를린)

=소니센터 안에 있는 레스토랑. 학센이 맛있었고, 맥주도 훌륭했다. 소니센터를 간다면 맥주 마시러 가볼 만한 식당.

7. Fischermann´s Restaurant(독일 슈트랄준트)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 슈트랄준트의 레스토랑. 항구도시 답게 대구 같은 생선을 이용한 요리가 많다. 유럽은 지역마다 맥주가 다른데 이 곳은 스퇴르테베커 슈바츠 비어가 유명하다. 저렴한 물가, 맛있는 음식. 

일정이 끝나고 호텔에서 맥주 한 잔. 마트에서 파는 맥주가 워낙 저렴하기 때문에 배낭에 물 대신 맥주를 넣고 다니고 싶었다.

프롤로그

여행의 가장 큰 걸림돌은 용기가 아닌 동기

① 부다페스트 밤의 풍경

야경을 아름답게 해주는 것은 빛이 아닌 어둠이다

② 부다페스트 키슈피파 레스토랑

글루미 선데이의 선율을 따라

③ 부다페스트 테러하우스

헝가리에게 히틀러와 스탈린은 현재진행형이다

④ 부다페스트 리스트 박물관

삶은 죽음을 향한 전주곡

⑤ 빈 제체시온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

시는 음악이 되고, 음악은 미술이 된다

⑥ 빈 벨베데레 미술관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 세기말을 그린 화가들

⑦ 빈 벨베데레 미술관

색들의 각축장, 클림트의 풍경화

⑧ 빈 프라터, CAFE SPERL

비포 선라이즈 사랑의 속삭임을 따라

⑨ 빈 미술사 박물관

그림으로 쌓아 올린 박물관

⑩ 프라하에서 읽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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