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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Mar 15. 2016

카르멘의 사랑은 제멋대로인 한 마리 새

⑫ 프라하 오페라 하우스 <카르멘>

카르멘의 심장을 날카로운 칼날이 꿰뚫는다. 카르멘의 비명은 때마침 투우장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성에 덮인다. 카르멘을 죽인 돈 호세는 그 자리에서 흐느끼고, 투우장을 빠져나온 사람들은 비극적인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카르멘은 죽었고, 돈 호세는 살았으나 역시 죽은 것과 마찬가지 신세다. 사랑은 어디로 간 것일까.


플젠에서 필스너 우르켈 맥주 공장 투어를 마치고 프라하로 돌아오자마자 오페라하우스로 향했다.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카르멘>을 보기 위해 미리 예매를 해두었다. 프라하에 머무는 동안 여러 편의 오페라가 무대에 올랐지만, 사랑의 도시에서 카르멘을 보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라하 오페라  하우스의 아름다운 샹들리에.

오페라 하우스는 프라하 중앙역 바로 옆에 있었다. 공연 시작 40여분 전부터 적지 않은 사람이 오페라 하우스에 도착해 있었다.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복장을 제대로 갖춰 입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만이 청바지나 후드티를 입고 왔는데, 나 역시 비슷한 복장이라 약간 주눅이 들기도 했다. 다행히 드레스 코드가 엄격하지는 않았고, 무사히 예매해 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동유럽은 오페라 관람료가 저렴하기로 유명한데 프라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로 치면 예술의 전당 같은 공연장이었지만 가장 저렴한 자리는 관람료가 290 코루나에 불과했다. 우리 돈으로 1만 4000원 정도. 무대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비싼 자리도 관람료가 1100 코루나(5만 3000원)였다. 오페라를 보지 않고 가는 게 손해라고 느껴질 정도다.


프라하 오페라 하우스는 규모는 아담했지만 내부 장식이 화려했다. 붉은 벨벳과 황금색이 관람석에 가득했고, 천장에는 거대한 샹들리에 조명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공연 시간이 임박하자 오케스트라가 조율을 시작했다. 현악기의 선율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조화를 이루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화음을 이뤘다. 사람들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오페라 하우스 전체가 어두워지고 무대의 장막이 걷혔다. 무대에는 왁자지껄한 한 무리의 여공과 군인이 자리하고 있다. 자유분방한 여공들과 질서 정연한 군인들.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희롱하고 유혹한다. 닮은 곳이라는 찾을 수 없는 서로 다른 두 집단 사이에서 생기는 긴장, 여기서 튀기는 불꽃이 때로는 사랑에 불을 지피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 중 하나인 <카르멘>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사랑을 노래한다. 이야기는 1820년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세비야에서 시작한다. 담배공장에서 일하며 몸을 팔기도 하는 카르멘은 여러 민족의 피가 섞인 집시 여인이다. 집시인 그녀에게는 순간의 성적 충동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삶의 전부다. 카르멘은 담배공장 여공들과 싸움을 벌인 죄로 체포되는데 자신의 호송을 맡은 돈 호세를 유혹해 도주한다. 하지만 카르멘은 한 남자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호세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호세가 집안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카르멘은 투우사 에스카미요와 사랑에 빠지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호세는 카르멘에게 돌아오라고 설득한다. 마지막 4막에 이르러 호세는 카르멘을 설득하는데 실패하고 자신의 사랑도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투우장으로 향하는 카르멘을 칼로 찔러 죽인다.

이야기 자체는 너무나 유명하기에 영어 자막을 굳이 볼 필요도 없었다. 사실 내가 앉은 4층 자리에서는 영어 자막이 샹들리에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기도 했다. 이럴 때 오페라 하우스의 규모가 아담하다는 점이 오히려 도움이 됐다. 투우사들의 발 굴리는 소리, 병사들의 기침 소리, 여공들의 치맛자락 날리는 소리까지도 이 작은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모두 생생하게 들리는 것이었다. 영어 자막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종종 이야기의 진행을 놓치기는 했지만, 오페라 하우스를 가득 메운 생생한 분위기 덕분에 배우들의 감정선은 놓치지 않았다.


카르멘은 처음 등장부터 마지막 죽음까지 시종일관 당당했다. 관능적이고 위협적이었다. 호세가 카르멘에게 돌아오라고 위협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오히려 호세가 위협당하고 있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호세의 위협을 뿌리치고 돌아서는 카르멘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목숨을 위협당하는 상황인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투우사를 향한 사랑을 지키려 하다니.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카르멘이 그렇게나 사랑의 정조를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었던가.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카르멘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누군가를 향한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할 수 있는 자유 그 자체였다. 에스카미요든 호세든 카르멘에게는 사랑의 대상일 뿐이었다. 카르멘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자유였다. 


카르멘의 아리아 '아바네라(Habanera)'의 가사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봤다.

사랑은 제멋대로인 한 마리 새, 누구도 길들일 수 없어. 
스스로 다가오지 않는 한 불러봐도 소용없지. 
협박도 애원도 소용없는 일.
....
사랑이여, 사랑은 집시 아이.
방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내가 당신을 사랑하면, 조심해요.
당신이 잡을 거라고 믿고 있는 새가
날갯짓 하며 날아가 버릴 거니까.

마리아 칼라스의 아바네라

테레사 베르간자의 아바네라


2시간 반이라는 긴 시간 동안 카르멘은 끊임없이 환희와 관능, 유혹에 휩싸이지만, 그가 진정으로 사랑에 도취된 순간은 마지막 죽기 직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죽음의 위협을 물리치고 자유를 지키는 그 순간, 카르멘은 사랑의 정열에 불타올랐을 것이다. 동유럽 곳곳에서 마주했던 집시의 사랑이었다. 거리에서 만난 집시들은 카르멘처럼 정열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들도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든 불타오를 수 있는 불티가 남아 있을 것이다.

오페라 <카르멘>은 주인공인 카르멘의 사랑 말고도 볼거리가 가득했다. 파스티아의 술집에서 카르멘이 추는 플라멩코는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을 담고 있다. 에스카미요가 부르는 '투우사의 노래'는 춤과 노래 어느 하나 부족하지 않은 완벽한 균형감을 보여준다. 미카엘라의 아름다운 아리아 '두렵지 않다고 말은 하지만'은 카르멘의 정반대에 선 또 다른 사랑의 모습을 그린다. 


미카엘라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미카엘라는 오페라가 끝나고 배우들이 무대인사를 할 때 가장 열렬한 환호를 받은 인물 중 한 명 이었다. 내가 느끼기에는 카르멘보다 미카엘라에게 쏟아지는 박수갈채가 더 우렁찼다. 미카엘라는 호세의 정혼녀다. 호세의 어머니가 미리 점찍어둔 여자다. 호세와 미카엘라는 그럭저럭 관계를 유지해 갔지만, 카르멘이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린다. '두렵지 않다고 말은 하지만'은 3막에서 미카엘라가 호세를 찾아가며 부르는 노래다. 자신을 버린 연인을 찾아가는 미카엘라의 마음을 너무나 투명하게 그리고 있다. 정말이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호수의 고요한 수면 같은 느낌이다. 이런 완벽한 정막, 투명함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잔잔한 호수는 누군가가 던질 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미카엘라가  부르는 '두렵지 않다고 말은 하지만'의 가사 중 일부다.

그 여인을 난 직접 보아야 해.
그녀는 위험한 사람이지. 아름답기도 하고.
하지만 난 두렵지 않아.
난 그녀 앞에서 거리낌 없이 말해야 해.
저를 보호해 주소서.
오 주여. 주여, 은총을 베푸소서. 아!

안나 모포의 미카엘라 아리아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바람이 외투 안을 파고들었다. 사랑의 도시에서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을 마주하다니. 조금 난처한 기분도 들었지만, 마음이 도리어 편해지기도 했다. 카르멘이 입고 있던 붉은 의상이 눈 앞에 계속해서 아른거렸다. 붉은 의상을 입고 플라멩코를 추는 카르멘은 불꽃같았다. 타오르는 불꽃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바람에 날리는 불티는 어디에 내려앉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계산할 수 없고, 예상할 수 없다면 그저 즐길 따름이다.


프라하 오페라 하우스 http://www.narodni-divadlo.cz/en

카르멘 사진 출처는 Royal Opera House Muscat


프롤로그

여행의 가장 큰 걸림돌은 용기가 아닌 동기

① 부다페스트 밤의 풍경

야경을 아름답게 해주는 것은 빛이 아닌 어둠이다

② 부다페스트 키슈피파 레스토랑

글루미 선데이의 선율을 따라

③ 부다페스트 테러하우스

헝가리에게 히틀러와 스탈린은 현재진행형이다

④ 부다페스트 리스트 박물관

삶은 죽음을 향한 전주곡

⑤ 빈 제체시온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

시는 음악이 되고, 음악은 미술이 된다

⑥ 빈 벨베데레 미술관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 세기말을 그린 화가들

⑦ 빈 벨베데레 미술관

색들의 각축장, 클림트의 풍경화

⑧ 빈 프라터, CAFE SPERL

비포 선라이즈 사랑의 속삭임을 따라

⑨ 빈 미술사 박물관

그림으로 쌓아 올린 박물관

⑩ 프라하에서 읽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⑪ 플젠 필스너 우르켈 공장

"맥주,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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