⑬ 프라하 <슬라브 서사시>
"어두운 가을의 구름이 당신의 머리 위를 지나가고 겨울의 흰 눈이 슬라빈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곧 봄이 다시 돌아올 것이고 체코 영토의 목초지와 숲은 온통 꽃으로 덮일 것이다. 영원한 평화 속에서 편히 쉬거라! 체코는 훌륭한 아들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1939년 7월 19일, 프라하의 비셰흐라드 공동묘지에서 알폰스 무하의 장례식이 진행됐다. 그 해 3월 독일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에 체포된 지 4개월 만이었다. 무하의 사인은 폐렴이었지만, 외신들은 그의 죽음을 "조국이 침공당한 데 대한 충격"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장례 연설을 맡은 막스 스바빈스키는 무하를 '체코의 훌륭한 아들'이라고 명명했다. 그렇게 알폰스 무하는 프라하의 땅에 묻혔다. 여인과 꽃, 자연을 이용한 '무하 스타일'로 20세기 초반 시각 문화의 혁명을 일으켰던 화가의 죽음이었다.
프라하는 무하의 도시다. 도시의 공공건물 곳곳에 무하가 그린 벽화가 남아 있고, 시내 중심부에는 무하 미술관도 있다. 프라하 사람들에게 무하는 하늘 위의 구름만큼이나 친숙한 존재다. 프라하 어디에나 무하의 그림이 있다.
하지만 프라하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없는 무하의 그림이 있다. 바로 <슬라브 서사시The Slav Epic>다. 슬라브 서사시는 무하 평생의 역작이었다. 파리에서 화가로서 대성공을 거둔 뒤에도 무하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꼈다. 체코와 다른 슬라브 민족의 아픈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이었다. 무하는 1000년이 넘는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다. 오래전 포스터를 통한 상업 미술에서 큰 성공을 거뒀던 무하는 <슬라브 서사시>를 통해 순수 회화로 복귀했다. 하지만 슬라브 서사시는 쉬운 작품이 아니었다. 20여 점의 작품을 그려야 했고, 몇몇 그림은 크기가 6x8미터에 달했다. 무하는 1912년부터 작업을 시작해 1926년에야 작업을 마쳤다. 그 와중에도 18번(The Oath of the Youth under the Slavic Linden Tree)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슬라브 서사시>는 무하의 바람과 달리 프라하에 정착하지 못했다. 무하와 그의 후원자인 찰스 크레인은 <슬라브 서사시>를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10주년을 기념해 프라하시에 공식적으로 기증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과 공산정권의 박해 때문에 <슬라브 서사시>는 체코 모라비아 시의 작은 성에 피신해 있었다. 그러다 2012년이 되어서야 <슬라브 서사시>는 프라하에서 전시를 시작했다. 그나마도 2016년 말까지만 프라하에서 전시가 이뤄지고 이후에는 다른 곳으로 옮겨질 예정이다.
프라하 여행을 준비하면서 <슬라브 서사시>는 반드시 보고 싶었다. 프라하에서 보낸 세 번째 날 마침내 <슬라브 서사시>를 보기 위해 숙소를 출발했다. <슬라브 서사시>는 프라하 내셔널 갤러리 중 'Veletržni palac'에서 전시 중이었다. 숙소에서 지하철로 두 정거장이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향했다.
평일 오전 미술관은 한적했다. 카페에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지만 로비는 한산했다. 입장권을 사고 <슬라브 서사시>가 전시 중인 1층의 특별 전시관에 들어갔다. 검은 장막을 걷자 <슬라브 서사시>의 웅장한 위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슬라브 서사시 연작 1번(The Slavs in Their Original Homeland)는 세로 6.1m, 가로 8.1m의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림이다. 검은 장막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바로 이 거대한 크기의 그림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는데도 벌어진 입 사이로 경탄 어린 한숨이 새어 나온다. 이 거대한 그림을 어디에서부터 봐야 할지 마음이 심란해질 정도였다.
그림의 하단에는 겁에 질린 채 웅크린 한 쌍의 남녀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들 뒤로는 이방인들이 슬라브 마을을 침략해 사람들을 끌고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 겁에 질린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다. 하지만 정면을 또렷하게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림의 오른쪽에 있는 신의 형상은 평화에 대한 슬라브 민족의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무하는 슬라브 민족의 탄생을 공포와 시련으로 묘사했다. 이 1번 그림은 마지막 20번 그림과 연결된다. 슬라브 민족은 공포와 시련의 역사를 극복하고 마침내 땅 위에 우뚝 선다. 1번 그림의 어두운 밤하늘은 마지막에 가서는 무지개로 대체된다.
20개의 그림들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비애감에 잠기게 됐다. 무하가 이 그림들을 그리면서 마음속으로 기도했을 슬라브 민족의 찬란한 미래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무하 역시 이 그림을 그리고 13년 뒤 자신의 조국을 침공한 독일군에 의해 체포됐다. 무하가 죽고 나서도 체코를 비롯한 슬라브 민족은 공산정권 아래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무하가 거친 손으로 붓을 쥐어 잡고 그렸을 한 장면 한 장면이 결국에는 그의 바람으로만 남은 것이다.
그림이 묘사하는 슬라브 민족의 위대한 역사들도 슬프기는 매한가지였다. 모든 민족의 역사가 마찬가지겠지만, 무하가 그린 그림들에는 전쟁과 죽음이 끊이지 않았다. 20개의 <슬라브 서사시> 중에는 전쟁 장면을 직접 그린 그림이 4개나 됐다. 슬라브 서사시 연작 10번(After the Battle of Grunwald)와 12번(Petr of Chelčice)은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지켜보는 게 힘들 정도였다. 12번 그림은 후스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하얀 천에 덮인 시체는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오히려 살아남은 사람들의 표정이 절망에 일그러져 있다. 무하는 <슬라브 서사시>에 나오는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을 모두 실제 모델을 구해 그렸다고 한다. 그림 속 인물들은 실제 프라하에 살았던 슬라브인들인 셈이다.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이 생생한 이유다. 불타는 도시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 사이에 중세 보헤미아의 사회사상가였던 헬치쯔키가 보인다. 헬치쯔키는 평화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는 분노에 찬 사람들에게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이것은 무하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10번 그림도 끔찍한 광경을 그리고 있다. 그룬발트 전쟁은 프로이센의 독일기사단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 사이의 전쟁이었다. 보헤미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편에 섰다. 연합군은 독일기사단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이 그림은 연합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폴란드 왕이 격전지를 방문한 모습을 그렸다. 캔버스 안에는 수많은 전사자가 나오지만, 이 그림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죽어 있는 말이다. 머리 부분에 피를 흘린 채 처참하게 죽어 있는 말은 전쟁이 인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전쟁은 보헤미아 지역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보헤미아는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전쟁터는 허무할 뿐이다.
마지막 20번 그림의 제목은 'Slavs for Humanity'다. 붉은색과 푸른색, 검은색, 노란색이 뒤섞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모든 것을 다 이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대한 남자의 모습은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는 슬라브의 어느 젊은이였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국가들의 국기와 사람들이 손에 쥐고 흔드는 꽃나무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한다. 모든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망과 염원이 가득한 그림이다. 앞선 19개의 그림에 가득한 죽음과 공포를 끝내고야 말겠다는 무하의 의지가 느껴졌다. 그래서 마지막 그림 앞에서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의 의지가 어떻게 꺾였는지, 그의 삶이 어떻게 끝났는지 알기 때문이다. 결말이 정해진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슬라브 서사시> 전시관에는 관람객이 거의 없었다. 전시실에 마련된 작은 벤치에 앉아 그림을 한참 들여다봤다. 몇몇 그림에서는 등장인물과 눈이 마주쳤다. <슬라브 서사시>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중 몇몇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6번(The Coronation of Serbian Tsar Štěpán Dušan) 그림에서 대열을 이끌고 있는 소녀가 그랬다. 소녀는 전통복장을 한 채로 꽃을 들고 있었다. 새로운 왕의 대관식이 끝난 직후의 모습이다. 온화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단호함이 서려 있다. 소녀는 자신보다 어린 소녀의 손을 잡아주고 있다. 두려움과 용기. 거대한 그림에서 오로지 그 소녀의 얼굴만이 눈에 들어왔다. 소녀는 관람객들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괜찮아. 할 수 있다."라고 말이다.
<슬라브 서사시>만을 위해 마련된 전시실은 고요했다. 내가 좀 더 귀를 기울였다면 그림들끼리 속삭이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림들은 서로 마주 보고 있었으니까. 그림 속 인물들은 반대편 그림에 있는 인물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역사란 어차피 과거와 현재의 대화니까.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는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압도적이고 웅장하고 몽환적이었다. 템페라 화법의 정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서글프고 안타까웠다. 오랜 역사를 압축하면 결국 기쁨이나 즐거움보다 고통이나 슬픔이 눈에 더 많이 들어오기 마련이다. 슬라브 민족뿐 아니라 우리의 역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음이 씁쓸해졌다. 무하의 말을 되새기며 전시실을 나왔다.
"내 작품의 목적은 가교를 놓는 것이다. 인류 모두가 가까워지고 이로써 쉽사리 서로를 점점 더 잘 알아가게 된다는 희망이 우리 모두를 격려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 나의 미약한 힘으로 이루어진다면, 적어도 우리에게, 우리 슬라브 민족에게 이렇게 된다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프롤로그
① 부다페스트 밤의 풍경
② 부다페스트 키슈피파 레스토랑
③ 부다페스트 테러하우스
④ 부다페스트 리스트 박물관
⑤ 빈 제체시온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
⑥ 빈 벨베데레 미술관
⑦ 빈 벨베데레 미술관
⑧ 빈 프라터, CAFE SPERL
⑨ 빈 미술사 박물관
⑩ 프라하에서 읽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⑪ 플젠 필스너 우르켈 공장
⑫ 프라하 오페라 하우스 <카르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