⑭ 프라하 <무하 미술관>
알폰스 무하는 예술 세계의 양극단을 오고 간 화가였다. <슬라브 서사시>가 민족주의에 입각한 순수 회화의 무하를 대표한다면, 무하 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포스터나 연작들은 그래픽 아트, 상업 미술의 무하를 대표한다. <슬라브 서사시>가 마음을 울리는 감동을 줬다면, 무하 미술관의 작품들은 보는 이의 넋을 빼놓는다. 무하는 자신에게 돈과 명예를 안겨준 그래픽 아트에 애착을 갖고 있었다. 동시에 무하는 순수 회화로의 복귀, 슬라브 민족과 체코에 대한 사랑을 마음속에서 키우고 있었다. 무하를 이해하려면 이 양극단을 모두 경험해야 한다.
무하 미술관은 프라하 중심부에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찾고 나서도 '여기가 미술관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작은 규모 때문에 미술관 건물을 다시 한 번 훑어보게 된다. 그만큼 무하 미술관은 작았다. 그동안 다녔던 동유럽의 다른 미술관들에 비하면 '미술관'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싶을 정도로 아담했다. 하지만 무하 미술관을 끝까지 다 둘러보고 나온 뒤에는 규모에 대한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무하가 창조한 여신들에 둘러 싸여 꽃밭을 거닐다 온 듯 한동안 환상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무하에게 돈과 명성을 안겨준 <지스몽다(Gismonda)>는 당대의 여신을 그린 작품이다. 지스몽다는 19세기 파리 연극계의 슈퍼스타였던 사라 베르나르를 그린 포스터다. 이 포스터를 그리기 전까지는 무하도 무명 화가에 불과했다. 1894년 12월 26일 베르나르가 자신의 포스터를 주문하기 위해 르메르 시의 인쇄소에 전화를 걸었다. 무하는 인쇄소에서 교정쇄를 감수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때마침 연말을 맞아 인쇄소 직원들이 모두 휴가를 떠난 상태였다. 다급한 일정 때문에 무하가 베르나르의 포스터 작업을 맡게 됐는데 이때 만들어진 작품이 지스몽다다. 사라 베르나르가 지스몽다 포스터를 공모했고, 여기에 무하가 당선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지스몽다 포스터는 무하를 일약 파리 미술계의 스타로 만들어줬다.
지스몽다는 당대 다른 포스터들과는 형식이나 내용 모두 전혀 달랐다. 길고 폭이 좁은 직사각형이었다. 워낙 길어서 위, 아래 두 장을 나눠서 찍어야 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중간에 접힌 자국이 보인다. 포스터 속의 사라 베르나르는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자태를 뽐낸다. 지스몽다는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역극이었다. 무하는 그리스라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그리스도 성화 형식 속에 구현했다.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포스터였다. 무하 미술관의 한 쪽 벽에 지스몽다가 걸려 있었다. 다른 포스터들 사이에 걸려 있었지만, 아름다운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무하 미술관에는 사라 베르나르 같은 여신이 빼곡했다. 무하가 파리에서 그린 포스터나 연작 작품들에는 여인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무하는 밝으면서도 파스텔풍의 아련한 색채, 뚜렷한 외곽선과 관능적인 곡선, 꽃과 나무 같은 자연적인 이미지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무하의 아름다운 그림 안에서 여인은 여신으로 거듭났다.
꽃과 각종 문양에 둘러 싸인 여인들의 모습은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이었다. 굽이치는 듯이 떨어지는 드레스 자락과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에서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꿈에 빠져 있는 듯한 여인들의 표정은 작품을 보는 이마저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환상에 빠져들게 한다. 그림을 감싸고 있는 화려한 장식들은 그림의 일부라기보다는 여신을 위한 제단처럼 느껴진다.
무하 미술관에는 무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지스몽다 외에도 수많은 그림들이 전시돼 있다. 그림 하나하나 무하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가득했다. 그렇게 그림들을 한참 동안 보다 보니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오! 나의 여신님'이랑 비슷하잖아?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오! 나의 여신님'에는 말 그대로 여신들이 등장한다. 뭐 하나 잘난 것 없는 대학생 모리사토 케이이치에게 어느 날 여신 베르단디가 찾아오고 둘이 함께 살면서 생기는 일들을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무하의 그림 속 여인들의 모습은 베르단디와 정말 많이 닮았다. 실제로 20세기 초 일본인들이 무하의 그림을 처음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무하 스타일의 그림이 일본에서 크게 유행했고, 그 흐름이 지금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작화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세일러문', '천사소녀 네티' 등 일본 애니메이션의 여러 캐릭터가 무하의 여인들과 닮아 있었다. 무하 자신도 일본의 그래픽 아트인 '우키요에'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세기 파리에서는 일본문화와 예술이 인기를 끌었는데 무하도 그 흐름에서 무관하지 않았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무하 스타일 자체가 동서양의 예술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례가 아닌가 싶다. 무하 스타일은 한국 만화에도 영향을 줬다. 황미나의 <레드문> 애장판 표지는 무하 스타일로 특별하게 제작되기도 했다.
무하 미술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는 <JOB>이었다. 그림에 대한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구인광고 포스터를 이렇게 공들여 만들었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담배회사인 'JOB'의 광고 포스터였다. 설명을 찾아보고 다시 그림을 보니 과연 여자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담배였다. 담배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여자의 뒤로 굽이치며 흘러나가고 있었다. 여자의 검은 머리카락과 담배연기가 묘하게 어우러지며 보는 이를 그림 속으로 끌어들였다.
<JOB> 포스터 외에도 무하는 정말 많은 포스터 작업을 진행했다. 그중에는 기업과 손을 잡고 그린 포스터도 많다. 네슬레나 모엣&샹동 같은 브랜드가 대표적이다. 파리 그래픽 아트 시장을 이끌었던 무하는 상업 포스터에서도 자신의 감각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특히나 무하에게는 상업 포스터가 단순한 돈벌이 수단만은 아니었다. 무하는 상업 포스터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전달하고자 했다.
"내가 살던 당시 파리의 벽들은 다른 도시들처럼 단조로웠지요. 광고인들은 장식 없는 형식과 단순한 인쇄로 만족했어요.(중략) 제가 포스터의 대중적 장점을 이용하고 싶었던 주된 이유는 폭넓은 사회계층이 예술 작품을 보고 흥미를 가질 기회를 주기 위해서지요. 광고에 예술 포스터가 필수 불가결해졌기 때문에 저는 물론 금전적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았습니다."(성공한 예술가의 초상, 알폰스 무하, 106p)
무하가 상업 포스터 작업만 한 것은 아니다. 미국 생활을 마치고 체코에 돌아온 무하는 자신이 나고 자란 체코에 대한 사랑을 포스터로 표현하기도 했다. <모라비아 교사합창단 콘서트 포스터>는 무하의 고향 사랑이 묻어나는 포스터다. 모라비아는 무하가 태어난 지역이다. 이 포스터의 여성이 입고 있는 옷이 모라비아의 전통 의상이다. 무하의 작품 속 여인은 주로 관능적으로 묘사되는데, 이 포스터의 여인은 발랄하고 경쾌해 보인다. 이때부터 이미 무하는 <슬라브 서사시>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파리 시절과는 달라진 무하 스타일을 엿볼 수 있었다.
이밖에도 무하는 각종 전시회나 박람회 포스터 등도 그렸다. 1896년에 그린 살롱 데상 전시회 포스터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특이하게도 이 포스터는 미완성인 상태로 인쇄됐다고 한다. 전시회를 후원하는 잡지사의 편집장이 미완성 상태의 포스터를 보고 마음에 들어 그대로 인쇄한 것이다.
무하는 한마디로 딱 잘라서 설명할 수 있는 화가가 아니다. 무하 미술관도 무하를 닮아 있었다. 무하의 삶의 궤적을 따라 전시가 구성돼 있다 보니 같은 미술관인데도 전시 내용이 극과 극으로 달랐다. 무하의 포스터와 연작들을 보다 보면 어느 순간 거대한 유화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황야의 여인>이다. 이 그림은 황야에 홀로 무너져 내려앉은 늙은 여인을 그리고 있다. 멀리서 빛나는 별빛은 아득하기만 하다. 언덕 너머에 짐승 무리가 무언가를 찾고 있다. 무하가 그린 것은 슬라브 민족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늙고 지친 여인은 슬라브 민족 전체를 상징하고 있었고, 아득한 별빛은 놓지 못한 희망의 끈이었을 것이다. <황야의 여인>은 <슬라브 서사시>를 암시한다.
<황야의 여인>을 기점으로 무하 미술관은 확 달라진다. 무하의 드로잉과 자화상, 유화 작품을 위주로 전시 물품이 바뀐다. 드로잉 중에서는 성 비투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위해 그린 드로잉이 인상적이었다. 가족들과 관련된 유품이나 드로잉도 많았다. 무하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고 한다. 위대한 예술가들이라고 해서 항상 가족을 버리거나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민족과 국가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특이하게도 작은 오르간처럼 생긴 건반 악기도 있었다. 설명을 찾아보니 하모늄이라는 악기였다. 무하는 파리에서 고향 생각을 달래기 위해 하모늄을 연주했다고 한다. 무하가 파리에서 교류했던 예술가들도 그의 하모늄을 친숙하게 여겼는데, 폴 고갱도 그중 한 명이었다. 무하 미술관에는 폴 고갱이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으로 하모늄 앞에 앉아서 찍은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그래픽 아트로 대박을 친 무하와 가난과 외로움 속에 죽어갔던 고갱은 정반대에 서 있는 예술가였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였다. 한 장의 사진이 그들을 이어주던 보이지 않는 끈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무하의 그림은 프라하 곳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무하는 시민회관의 장식 작업에 참여했고, 중앙우체국 내부의 거대한 벽화는 무하의 작품이었다. 성 비투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에도 참여했을 정도로 무하는 프라하 곳곳에 자신의 손길을 남겨 놓았다. 프라하가 동유럽을 대표하는 관광도시가 된 데에는 무하의 영향력도 컸을 것이다. 무하는 프라하라는 도시에 통일성을 선물했다. 그저 아름다운 그림이나 장식을 중구난방으로 여기저기 남긴 것이 아니라 무하 스타일로 도시 전체를 장식했다.
미학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서울과 프라하의 가장 큰 차이점이 여기에 있었다. 프라하에는 무하라는 미학 설계자가 있었지만, 서울에는 없었다. 위대한 예술가가 도시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됐다. 예술은 의외로 우리 일상의 많은 부분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 무하 미술관은 내부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어 그림과 사진은 무하재단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무하 재단 http://www.muchafoundation.org/
프롤로그
① 부다페스트 밤의 풍경
② 부다페스트 키슈피파 레스토랑
③ 부다페스트 테러하우스
④ 부다페스트 리스트 박물관
⑤ 빈 제체시온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
⑥ 빈 벨베데레 미술관
⑦ 빈 벨베데레 미술관
⑧ 빈 프라터, CAFE SPERL
⑨ 빈 미술사 박물관
⑩ 프라하에서 읽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⑪ 플젠 필스너 우르켈 공장
⑫ 프라하 오페라 하우스 <카르멘>
⑬ 프라하 <슬라브 서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