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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에 대하여-1

by 비비안 Mar 12. 2025

할아버지는 예전부터 당뇨를 앓고 계셨다. 고혈압도 있고 뇌졸중 때문에 언어 인지능력도 상당히 저하되어 있었다.


매번 주기적으로 부모님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신촌세브란스 병원을 다녀오셨다.

다녀오실 때마다 약이 한 바구니, 하루에 복용해야 하는 약이 어찌나 많은지.

어린 나의 눈에는 말도 안 되게 많은 양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병원에 갈 때마다 할아버지에게 술을 줄이고 음식 조절을 하라고 했다.

매번 조금씩 정신을 차리신 것처럼 행동하셨다.

"이제부터 내가 술은 아예 입~에도 안 댈 거다."라고 말한 지 삼일도 되지 않아 마트에 가서 막걸리를 몇 병씩 사 오신다.

"이거 없으면 인생이 재미가 없는데 어떻게 하니~? TV에서 의사가 이게 몸에 좋~대요~! 허허허"

당신의 말을 부침개 뒤집듯 뒤집은 것이 민망하신지 허탈웃음을 지으며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신다.


쓰레기통에 매일같이 나오는 막걸리 한 병, 종종 맥주병와 소주병.

할아버지는 술을 즐기셨다. 술을 물처럼 드시고 술 없이는 인생이 재미없다고 하셨다.



음식 또한 당뇨환자에 맞게 저염 저당으로 드셔야 하는데 고집 센 할아버지가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젓갈에 밥 먹는 걸 좋아하셨고, 모든 음식은 짜고 달게.

미원, 다시다, 설탕, 소금, 간장, 젓갈 아낌없이 양념을 하고 맛있게 드셨다.


그나마 소식을 하는 편이라 이렇게 드셨음에도 80 넘게 사신 것 같다.

맛있는 걸 드시다가도 어느 정도 양이 차면 수저를 내려놓으셨다.

대식가인 우리 가족은 소식가 할아버지를 신기하게 보았다.



간식거리도 좋아하셨다.

매번 침대 머리맡, 장롱 안 어딘가에 캔으로 된 장조림이나 골뱅이가 숨겨져 있었고 곶감, 빵, 견과류 등등 다양한 것을 숨겨놓고 드셨다.


건강을 위해 저당 간식을 사서 방에 넣어드리면 맛이 없으신지 그대로 냉장고에 반납을 해두신다.

양념을 적당히 한 단백질 요리를 방에 넣어드리면 종종 입맛이 맞을 때만 드시고 5번 중 3번은 "난 너희가 한 음식이 입에 안 맞는다."라고 하시며 반납을 하신다.


저절로 할아버지는 스스로를 위해 재료를 사 오고 스스로를 위해 요리를 해 드셨다.

그의 까다로운 입맛 때문에 할아버지의 몸 관리는 당신의 책임이 되었다.



잘 지내는 듯했다.
당뇨인데 저렇게 술을 마시고 음식을 마음껏 먹어도 큰 탈 없는 게 신기했다.

'스트레스를 안 받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셔서 괜찮은가 보네.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정확히 무엇 때문에 할아버지가 안 좋아지기 시작한 건지 잘 모르겠다.


어렴풋 기억에 나는 건..

2023년 여름, 비가 오는 날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전거를 타고 한강에 나가셨다가 크게 넘어지셨다.

한쪽 허벅지 전체에 멍이 들었고 한동안 붕대를 칭칭 감고 파스를 온몸에 뿌리고 다니셨다.


그때부터 조금씩 야외 활동이 줄어들었다.

시장에 가서 레몬을 사 와 달라고 부탁을 드리면 귀찮으신지 근처 마트에 가서 사 오셨다.

원래 할아버지가 하는 행동과는 다른 양상이었지만 그런가 보다 했다.


2024년 초부터는 집안에서 하는 활동조차 귀찮은 것처럼 보였다.

원래도 부엌을 지저분하게 사용하셨지만 갈수록 더 지저분해졌다.


그러다 갑자기 시장에서 엄청 많은 생곱창과 내장을 사 오셨다.

엄마가 모두 손질을 하여 냉동해 두었다. 할아버지는 별로 드시지도 않으셨다.


어느 날은 1.8L 대형 콜라와 사이다를 1~2통씩 벌컥벌컥 마셨다.

목이 마르다는 말과 함께 쓰레기통에는 술병 대신에 탄산음료가 한가득이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만류에도 말을 듣지 않으셨다.

너스레를 떨며 말하셨다. "아이! 괜찮아요~!!"


결국 나는 엄마아빠에게 SOS를 청했고 그날 저녁 아빠에게 호되게 혼나셨다.

그 이후 탄산음료 섭취는 조금 줄어드는가 싶었다.


한 번은 음식점에 가서 다 함께 밥을 먹고 맥주를 한잔 하셨는데 갑자기 속이 안 좋다고 하셨다.

할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힘들어하는 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집에 가는 내내 표정이 안 좋으셨고 그날은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으셨다.


그러다 어느 날 배가 아프다고 하셨다.

"배가 우리~하다."

변비약을 지어드렸는데도 멈추지 않으셨다. "배가 우리~하다."


대장내시경을 해보았지만 큰 문제가 없다고 했다.

내과에 방문했지만 별 문제없어 보인다고 했다.


신촌 세브란스에 갔더니 당뇨가 심해졌다고 했다.

그때부터 할아버지의 다리가 퉁퉁 부었다.

식단을 하지 않으면 다리를 잘라야 한다고 했다.


그때부터인가 언제부터인가.. 고통의 시간은 뒤죽박죽 하다.


어느 날부터는 귀신 들린 사람처럼 집안을 빙글빙글 미친 듯이 걸어 다니시고,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걸었다가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그 무엇 하나 집중하지 못하셨다.


평소 드시던 대로 못 드시다 보니 변비에 시달리셔 3시간에 한 번씩 문 연 화장실 안 변기에 앉아 괴함을 지르셨다. 부모님 방을 뒤지면서 변비약을 찾아내셨다.

필요 이상으로 변비약을 드시고 배를 어루만지시면서 "이상하다. 배가 이상~하다. 묵직~하고 아프다."라는 말을 반복하셨다.


이상하게 생긴 자동으로 움직이는 장난감을 사 오셔서 방에 두시는 것도 께림찍했다.


생전 청소라는 것을 모르시던 분이 갑자기 방 대청소를 하셨다.

많은 것을 버리고 정리하셨다. 필요 없는 라디오는 아빠에게 주기도 하셨다.

이것이 신호라는것은 꿈에도 몰랐다.


침대 옆에 몇 살까지 살 것인지 적어두셨다. 86, 87, 88, 89, 90.

90살까지 살다가 죽을 거라고 말하셨다.

자꾸 주변에 죽은 지인들 이야기를 하셨다. "옆집에 누구도 죽었다더라. 내 친구 누구도 죽었잖아. 다 죽었어."


하루에도 몇십 번을 나가시고 낮에는 의자에 앉아 코를 골고 주무셨다.

밤에는 잠에 들지 못하셔서 거실을 뱅글뱅글 도시다가 야간산책을 하러 나가기도 하셨다.

음식양을 많이 줄였기에 몸이 빼짝 마르셨다. 갈비뼈가 훤히 보였다.


샤워타월에 물을 묻혀 상의를 축축하게 적신 상태로 물을 뚝뚝 흘리며 거실을 걸어 다니셨다.

방 침대 위에서 공업용 절단기로 철 스탠드를 자르다가 나에게 제지당하셨다.

새벽에 얼린 우거지를 꺼내 못과 망치로 조각내 빨리 녹이려는 행동을 하다가 혼나셨다.



식단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내가 전적으로 식단을 책임졌다.

부모님은 헬스장 근무로 인해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묶여있었기에 내가 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 재택근무 일이 끝나면 저녁에는 할아버지의 음식을 준비했다.


모든 야채를 물에 한번 데쳐내야 하고, 최소한의 간과 조미료를 넣어야 한다.

이걸 무슨 맛으로 먹지 싶은 음식이 아니면 당뇨신장식이 아니었다.

매일 유튜브를 보고 구글링을 해서 최대한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드릴 수 있게 공부했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봐도 마음이 아팠던 적이 있어 가끔 비엔나소시지를 데쳐서 넣어드리기도 했다.


하루 세끼, 간식 두 번.

매일같이 준비해서 냉장고에 넣어둔다.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서 건강식 카레, 짜장밥, 비빔밥, 소고기간장비빔면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만족하지 못하셨다.

너무 배고프다고 매일 울부짖으셨다.


배고픈 게 아니고 맛이 없으셨던 거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건강상태와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셨다.



난 매일 이상행동을 하며 싫은 소리를 하는 할아버지에게 지치고 말았다.

불과 몇 달 되지 않았는데도 지쳐버렸다.


할아버지에게 소리소리 지르기도 하고 자꾸 몰래 음식을 드시는 할아버지 때문에 냉장고에 박스 테이프를 붙인 적도 있다.

"마음대로 드시면 다리 잘라야 한다잖아요! 내가 밥 해주는데 왜 그래요!!"


할아버지는 두 손으로 당신의 목을 부여잡으며 괴로워하셨다.

"그러지 마라. 나한테 너무 그러지 마라. 배고파서 그러지. 조금만 더 줘라. 숨이 잘 안 쉬어진다. 숨이 잘 안 쉬어져."


치매라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치매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할아버지는 부모님과 함께 주민센터에서 치매검사를 받았고 집에 오시면서 노발대발 욕을 하셨다.

"내가 왜 치매냐! 왜 그런 검사를 시키는 거냐. 미친 여자가 나한테 몇십 분이나 질문했는지 알아? 똑같은 말 하고 똑같은 말 하고."

치매라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치매가 아닌데도 온갖 곳에 우리 집 현관 비밀번호를 써두셨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키패드 바로 옆, 현관 맞은편, 우산 손잡이, 할아버지의 슬리퍼 측면 등 온갖 곳에 집 비밀번호를 적어두셨다. 그럼에도 치매라는 결과가 아니라니 혼란스러웠다.


우울증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노인 심리상담소를 찾아보자고 했다.

엄마는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신신당부하셨다.

"할아버지 자극하지 마. 나는 할아버지가 널 해칠까 봐 두렵다."

"할아버지가 왜 날 해쳐. 걱정 마 잘할게."라고 대답했다.



매일같이 싸우고, 식사를 준비해 드리고, 화장실에서 나는 고함소리를 듣고,

새벽마다 부모님 방에 들어가서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시고, 낮에는 아빠에게 전화해서 죽을 거라고 말하시고..


할아버지는 고장 난 장난감처럼 거실을 빙글빙글 서성이시고, 밤새 부엌불을 켰다가 껐다가, 냉장고를 열었다가 닫았다가를 반복하셨다.


우리 모두 지치고 말았다. 긴장감이 사라지고 서로에게 날이 세워졌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할아버지에게 이젠 음식을 안 해드릴 테니 마음껏 드시라고 말씀드렸다.

대신 양을 조절해 보자고 했다. 라면을 먹더라도 반만 먹고 국물을 먹지 말라고 말씀드렸고, 탄수화물보다는 야채 위주로 먹어보자고 말씀드렸다.

선택의 폭을 넓혀드리고자 했던 마음도 있었고 스스로 요리해드시다가 귀찮아지면 다시 내가 한 요리를 군말 없이 잘 챙겨드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옳지 않은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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