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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그레이 May 04. 2024

어머니는 담배꽁초를 입에 물었다.

4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묵은 장소는...


결국 어머니는 고집을 굽히고 내 손을 잡아 밖으로 나섰다. 집으로 향할 줄 알았던 발걸음은 뜻밖의 방향으로 선회했다. 그녀는 응급실 문 앞에 비치된 휠체어 하나를 꺼내 나를 앉히고, 다른 출입구를 통해 병원 내부로 들어갔다. 1층 로비에 멈춘 그녀는 내게 기다리라 말하고서 혼자 밖으로 나갔다. 나는 어둠 아래 초조하게 주위를 살피며 기다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과 졸음이 자꾸 차올라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어지러운 시간 속에 떨궈지는 고개를 겨우 가눴다. 이 외로운 사투가 한계에 다다랐다고 느낄 때쯤, 어머니가 돌아와 검은 봉지를 건넸다. — 봉지 안에는 빵 몇 개, 빠다코코넛, 우유가 담겨 있었다. — 어머니는 잠시 숨을 고른 뒤 휠체어를 밀고 옥상에 올라갔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그 속에는 새 담배가 아니라 타고 남은 담배꽁초가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꼬깃꼬깃한 꽁초를 양손으로 조심히 펴며, 모양을 되살리려 애썼다.


『에이 씨발…』  그녀는 정성 들여 복원한 담배꽁초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 했으나, 불이 붙지 않자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던져버렸다. 이어 바닥에 흩어진 다른 꽁초들을 둘러보더니, 비교적 긴 꽁초를 주워 입에 댔다.

「병원 옥상, 검은 벨벳의 정적을 깨며 착착 울리던 라이터 소리, 담배종이가 직직 타들어가며 귀를 간질이던 느낌. 눅눅한 밤공기와 어우러진 갈색 담배 향을 향수처럼 그러안고 있다. 골초인 어머니가 사 온 것이 자신의 담배가 아니라, 내게 줄 빵과 우유였다는 것에 유념하여, 그녀가 불린 것은 단지 배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여전히 그 회억을 꺼내어 먹는다.」


어머니는 주운 담배를 모두 태우고 나서,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 비치된 내부 안내도를 유심히 살피더니, 8층으로 향했다. 『내려 봐, 걸을 수 있지?』 8층에 도착하자 그녀가 나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왜인지 모르게 섭섭하고 억울했지만, 그런 감정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걸음 더 들어가니 빨간 띠가 붙은 유리문이 보였다.

『누가 물어보면, 아빠가 매우 아프다고 해. 저 안에서 수술받고 있다고 해.』 어머니가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왜 그래야 하나 싶어 열 번쯤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수술실 앞에 마련된 보호자 대기실로 들어섰다. 그 작은 온돌방은 수술 환자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우리는 겨우 비집고 들어가 구석에 자리 잡았다. 모두가 몸을 웅크리며 서로의 공간을 배려해 주었다. 나는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무거운 눈두덩이를 내렸다.


『아이고… 애가 어린데 이 시간에… 누가 수술실에 있어? — 애 아빠가요, 갑작스러운 사고로… — 쯧쯧쯧, 그래서 수술은 얼마나 걸린대? — 상태가 심각해서 오래 걸릴 거래요. 오늘 밤은 꼬박 여기서 지새워야 할 거예요…』


어머니는 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다른 사람과 대화 나눴다. 그녀의 목소리는 헤어날 수 없는 비애에 잠겨 있었다. 수술실 안에 어머니를 슬프게 할 것이 전혀 없는 걸 알면서도, 그럴듯한 설움을 간직한 그녀가 안쓰러웠다. 그 비통함은 무엇이었을까? 죽음과 사투하는 정체불명의 남편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고, 본인 삶에 대한 쓰라린 회한이었을까? 우리는 그녀의 진정한 비참과, 거짓된 말에 힘입어 그곳에서 하룻밤을 무료로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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