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것질을 너무 좋아했던 어릴 시절 나는 외할머니댁에 가는 것이 곤욕이었다. 집 주변에 있는 가게를 가려면 30분을 넘게 걸어가야 하는 시골 중에서도 아주 더 깊숙한 시골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자연에 놀거리와 먹거리가 넘쳐 났지만 어린 내게 외할머니댁은 하루가 1년 같은 곳이었다. 간식의 금단 현상을 이겨낼 수 없었던 나는 결국 주방 일을 돕느라 정신없는 엄마에게 30분 넘게 걸어가야 하는 구멍가게에 가자고 졸랐다. 그 모습을 본 외할아버지는 나를 불러 따라와 보라며 손짓하셨다.
드디어 구멍가게에 가보는 것인가 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신이 나서 신발을 신고 외할아버지를 부르니 할아버지는 방 안 창고 앞에서 내게 오라는 손짓을 하셨다. 옛날에는 안 쓰는 방에 여러 물건을 넣어 둔 곳을 광이라고 불렀는데 할아버지는 그 광 앞에 서서 말씀하셨다. "광에 있어. 너 줄 거." 나는 군것질을 잔뜩 살 기회가 날아가 버리자 기대했던 마음이 한 번에 팍 식었다. 신발을 대충 벗어던지고 할아버지를 따라 깜깜한 광에 들어갔다. 그 방은 겨울인데도 보일러를 켜지 않아 발바닥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고 온갖 살림살이들이 뒤죽박죽 섞여 요상한 검은 형태로 보여 으스스한 느낌이 났다. 그 깜깜한 광 안 사이로 들어가 사라진 할아버지가 무언가를 찾는 뒤적이는 소리가 나더니 쟁반에 무언갈 담아 나오셨다.
맛있는 사탕이나 초콜릿이 있을 거라는 내 마지막 희망이 무색하게도 힘 없이 무른 감들이 놓인 쟁반이 보였다. 내 표정을 본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이 녀석아. 이게 홍시라는 거야. 내가 겨울 내내 먹는 간식인데 얼마나 맛있는 줄 알어? 한번 조금만 먹어봐." 무르고 요상한 느낌의 감이 맛있다니. 정말 먹고 싶지 않게 생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계속된 권유에 안 먹을 수 없어 조금만 먹고 말아야 하지라고 생각하고는 껍질을 벗겨 대충 한 입 베어 먹었다. 은은하게 달콤하고 아이스크림처럼 시원한 맛. 나는 그 첫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내가 눈이 휘둥그레져 할아버지에게 맛있다며 연신 따봉을 보냈다. 지저분해진 손과 얼굴에도 개의치 않고 맛있게 먹는 내 모습에 할아버지는 씨익 웃으시고는 "너니까 내 홍시 더 준다." 하시며 광에서 홍시를 더 가져다주셨다.
나이가 들어서도 감은 언제든 먹을 수 있고 홍시도 언제든 먹을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때 외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홍시 맛과는 달랐다. 그래서 더 그 맛이 그리워 생각이 난다.
광에서 느껴진 차가운 바닥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한 달콤했던 홍시와 할아버지의 미소 가을과 겨울 그 사이쯤 될 때 가끔 한 번씩 그때를 떠올리곤 한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했던 기억 하나를 글로 적어 본다.
그때 그 추억은 내게 따뜻한 미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