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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물킴 Sep 02. 2020

미약한 시작을 감행할 용기

재미와 실패의 위력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금방 싫증을 내는 편이었다. 어느 것 하나를 진득하니 좋아하기보다는, 짧게 짧게 경험하고 또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곤 했다. 한 친구는 그런 나를 보고 '머리가 좋아서 어떤 것을 마주했을 때 금방 간파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취미든, 일이든.'이라는 가설을 내놓았지만, 중학교 시절 확인했던 내 IQ는 92였다. IQ 검사의 신뢰성을 의심할 수도 있었지만, 왜인지 나는 그 뒤로 '내 머리는 나쁘다'라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다른 방식으로 나를 성장시켰다.


'이렇게 금방 싫증 내버리는 내가 재미를 느낀다면 반드시 붙잡고 파봐야 해.' 

'나는 머리가 나쁘니까 남들보다 더 성실하게 노력해보자.


두 가지 생각이 어렸을 때부터 강박처럼 자리를 잡게 되었다. 물론 이 두 가지 생각이 때로는 스트레스가 되기도 하지만, 3~40년이라는 시간을 돌아봤을 이 생각들은 어느새 나의 태도와 습관이 되어 생각보다 많은 결과물을 안겨주었다.



1.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영화를 찍던 중학생이 칸 영화제에 가기까지

'재미의 위력'


 중학교 때 방학숙제로 국어책에 나와있는 소설을 대본으로 바꿔, 조 친구들과 테이프에 녹음 해오라는 숙제를 받았다. 나는 그 소설이 재밌지 않았다. 무슨 생각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호기롭게 방학 동안 조 친구들과 대신 영화를 찍어오겠다고 선포했다. 그게 더 재밌을 것 같았다. 촬영, 대본, 편집, 음악 등을 내가 맡았고 친구들은 연기, 조명 등을 맡았다. 제목은 '왕따 보고서'. 야심 찬 호러 장르(아마도 그때 유행했던 여고괴담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였지만, 개학 후 숙제 검사를 한 선생님은 집에서 깔깔깔 웃으셨댔다. 그리고 선생님은 우리에게 전교생을 대상으로 '감독/배우와의 대화'를 열어주셨다. 그 뒤로도 영화 동아리 참여, 영화 감상문 쓰기 등 영화는 내 인생 전반에 항상 걸쳐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당시엔 그 재미와 호기심의 유효기간을 예측하긴 어려웠다. 


 대표님을 포함해 직원 4명인 영화 홍보 에이전시에서 일을 할 때 제의받았던 연봉은 1800만 원이었다. 남들은 한 달에 천만 원도 받는다던데, 연봉이 그랬다. 처음 그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가서 내가 한 일은 대표님 방 쓸기, 화분에 쌓인 먼지 닦이, 선배들이 마신 컵 닦기 등이었다. 그 와중에도 내가 고민한 단어들이 하나둘씩 보도자료에 담기고, 때론 카피가 되어 포스터에 얹어지는 경험들을 한다는 것이 마냥 짜릿하기만 했다. 


 영화 일을 한다는 것이 항상 즐겁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열심히 고민한 결과물들이었지만, 대중의 마음을 건드리기는커녕 욕이나 실컷 먹고 일주일 만에 상영 종료를 했을 때. 예민한 배우들의 심기를 건드려 이유 없는 잔소리를 실컷 들었을 때 등 지나간 날들을 떠올리면 스트레스 속에서 보낸 날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재미'는 그 고통과 힘듦을 견딜 수 있게 해 주었고, 

그 견딤 속에서 생각지 못한 기쁨과 결과들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나갔다.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들은 과감하게 인생에서 배제해 선택지를 줄였다. 그리고 내가 재미를 느끼는 것에 조금 더 집중해 정성과 시간을 쏟기 위해 노력했다. 고민거리를 심플하게 만들고, '미약한 시작'까지의 과정을 최대한 줄여나갔다.



2. 회의실을 잘못 잡아 혼나던 신입사원이 팀장이 되기까지

'실패의 위력'


 대기업 신입사원으로 들어간 첫 해, 회사 내 임원들이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대규모 회의의 일정과 장소를 어레인지 하는 일을 맡았다. 별 일 아닌 것 같지만, 각 사업부 임원들의 파워게임 사이에서 '균형감'과 '공평함'을 유지한 결론을 내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무사히 매달 넘어가나 했지만, 결국 사고가 났다. 중복으로 잡혀있던 다른 대규모 회의와 일정이 겹쳐버린 것이었다. 모였던 사장급 임원들은 모두 황당해하며 돌아가버렸다. 사수에게 와장창 깨지고 현타가 왔다. 나름에는 4년제 대학을 나와 똑 부러지는 성격이라고 자부하며 살았건만 회의실 어레인지 하나를 제대로 못해내다니. 그때 멍해진 나를 팀장님께서 부르셨다.


"물킴 씨, 지금 하는 일 재밌나?"

"네, 재밌기는 합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다 하는 실수예요. 언제쯤 이 실수를 하나 나는 기다렸네. 

성장한 거라고 생각해봐요."


좋은 팀장님을 만난 것도 복이었지만, 이런 조언을 해주시는 시니어를 신입사원 때 만난 것이 더 큰 복이었다. 그 뒤로 조금씩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연습을 했다. 좀 더 난이도 있는 업무들에 나서 보기도 하고, 호랑이로 군림하는 선배가 하는 프로젝트에 자진해보기도 했다. 비교적 편하게 시간을 활용하며 월급을 받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나는 내 시간을 그렇게 쓰고 싶지 않았다. 주니어 시절에 거침없이 배우고, 혼나고, 깨지고. 터프한 선배들과 거친 필드를 뛰어다녔던 경험이 시니어가 된 이후 정말 많이 도움이 됐다. 그때 단단히 생긴 체력과 마음의 굳은살들이 나를 더 견고하고 단단한 사람이 되게 해 주었다. 그리고 나 역시, 팀장이 되어 실수하는 주니어를 만났을 때 그것이 성장의 기회가 되도록 끌어주는 리더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미약하지 않은 시작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후일담, 멋들어진 퇴사 이유 등을  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과감히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결정하고, 미약한 시작을 겸허히 받아들일 때 긴 여정은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여태껏 인생에서 경험한 몇 번의 빅 이벤트들은 사실 내가 감히 계획할 수도, 준비한 것도 아닌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미약한 시작' 앞에는 '재미'를 느끼는 내가 있었고, 

뒤에는 '실패'를 반복하는 내가 있었다.


 40을 곧 앞두고 있는 나는 여전히 외롭고 불안하다. 다만 이 불안감을 마주하는 지금의 나는 20대의 나와는 조금 달라지게 되었다. 막연한 미래를 걱정하며 주저하는 시간을 보내기보단, 조금 더 내가 원하는 것을 생각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써나가려고 애쓰고 있다. 곧 마흔을 앞두고 있을 즈음.  나는 기꺼이, 재미를 느끼는 나를 기특해하고, 마음먹는 나를 응원해주고, 실패하는 나를 다독여주는 '나의 팬'이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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