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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미 Jun 08. 2024

퇴사를 당했다

발상의 전환 : 여름방학 탐구생활의 시작

문자 그대로다. 하루아침에 퇴사를 당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성인들이 어쩜 이렇게 몰상식하고 무자비한 행포를 벌일 수 있냐! 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사실 사회는 더 냉철하고 냉혹하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에너지가 헛수고로 끝날 것쯤은 알법한 나이가 됐다. 내가 해야 할 최선은 빠르게 다음 스텝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처음엔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 스스로에 대한 걱정과 연민, 동시에 책망이 혼연일체 되며 혼란스러웠다. 복기를 해보니 시그널은 분명하게 있었다. 내게만 주지 않는 정보, 무슨 말을 해도 벽과 소통하는 기분, 나만 모르게 움직이는 일사불란한 상황들. 어찌 보면 내가 알아서 나가떨어져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끝까지 모른 척 외면하고 있던 건 나였을지도.


내가 1년 여 동안 몸 담았던 회사는 농사짓기 힘든 곳에 터를 잡아 돌을 솎아내 땅을 갈아엎는 시간을 걸쳐 비옥한 토지를 만들어낸 곳이다. 이후 양질의 거름을 듬뿍 주면서 농작물은 쑥쑥 자라게 됐고, 사람들마다 '저 집은 왜 이렇게 농사가 잘돼?' 하며 추켜세웠다. 당연히 추수철이 되면 줄을 서서 생산물을 사가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지역 토박이들은 당연히 우리를 못마땅히 여겼다.


하지만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안으로 들어오면 회사의 모습은 조금 다르다. 땅 주인은 '쌀을 심자'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작 땅 주인이 어떤 쌀을 원하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다 보니 각각 구역을 담당하는 농부들이 자기만의 농사법으로 각각 다른 종자의 쌀을 심고 있다. 그리고 서로 '저 종자를 왜 심냐? 하 답답하다'한다. 모두 자기의 종자가 최고라고 여기면서.


'이러나저러나 쌀만 수확되면 된다'라고 한다면 좋은 회사고, 어떤 면에서는 '쌀을 수확하는 건 맞는데, 종자가 섞여서 상품성이 떨어진다' 평가를 받을 회사인 것도 맞다.


이 회사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각각의 다른 종자의 쌀이 심어져 있는 것을 인정하고 종자간 가치를 전략적으로 정리, 계속 그 땅에서 농사를 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지난 1년은 '우리가 왜 이 땅에서 농작물을 심는지' 농사의 명분을 만들어 주는 작업을 했고, 올해 하반기부터는 각각 종자의 가치를 올려 우리가 만드는 쌀이 얼마나 좋은지 설득하고 포장지를 입히는 작업을 해야 했다. 난 후자를 준비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 회사와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었다. 회사에서 채용 담당자가 월요일 오전 10시에 실무진 면접을 잡아놓고, 일요일 저녁 6시까지 나에겐 아무 연락이 없었다. 월요일 오전 10시 면접은 나만 몰랐던 면접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나를 추천해 준 분이 일요일 저녁에 "내일 면접 준비 잘하고 있냐?"는 메시지를 보내 사실을 알게 됐고 면접을 제시간에 진행할 수 있었다.


채용 프로세스를 마친 후 입사를 해서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함께 극복해 보자고 힘을 북돋아준, 나를 추천해 줬던 그분이 입사 한 달이 조금 지나 퇴사를 했다. 사실 내가 입사하기 전부터 퇴사에 대해 논의하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말을 해주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내가 몇 번이나 '퇴사하는 거 아니냐?'라고 물었음에도 아니라고 했었는데. 누군가의 퇴사가 크게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상황에 따라 이게 변수가 될 수는 있다. 졸지에 제대로 된 인수인계 없이 가장 중요한 시기에 무거운 업무를 맡았고, 히스토리가 부족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는데 실패했다.


커뮤니케이션 역시 잘 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디렉션이 명확하지 않았다. 같은 이야기를 나눠도 임원들마다 방향성이 각각 달랐고, 누구에게 컨펌을 받느냐에 따라 지시 사항이 미세하게 변했다. 입사 초기에 팀 리드에게 '우리 회사의 상황이 이러니 A전략이 좋겠다'라고 이야기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일단 B를 먼저 하세요'였다. 그러던 어느 날 대표는 나와 팀 리드를 소환해 왜 A를 하지 않느냐고 나무랐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팀 리드는 본인의 의도를 내가 잘 이해 못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서로의 신뢰가 와르르 무너진 순간이다.


이 모든 사례들이 오직 나의 억울함에 당위성을 부여하려는 핑계라 본다면 그것도 맞다. 제 할 일을 다 하고, 심지어 상반기에는 아무도 풀지 못했던 숙제까지 해결했는데 바쁜 시기 다 끝나고 최대 실적을 이루자 적반하장으로 나오니 억울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회사와의 이별을 수용했다. 어차피 바뀌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어서다.


퇴사 통보를 받고 이유를 물었다. 여러 가지 상황을 들었지만 납득은 되지 않았다. 덧붙이는 말들은 사실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짜치는' 핑곗거리였다. 어차피 그만두니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해봤지만 끝내 아무 말이 없었다. 아재들의 단합된 정치력에 나란 존재가 그저 불편하게 여겨졌다고 한 마디만 해줬으면 수용했을 텐데. 10년 넘게 일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단련이 많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이 회사에서 처음 알았다. 비즈니스는 사무실이 아니라 밖에서, 문서나 회의가 아니라 술과 담배로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난 아직도 순진하고 멍청했다.


"오늘부터 일은 하지 않겠다"며 짐을 싸서 회사를 나왔다. 아무에게 말도 걸지 않았고, 인사를 하지도 않았다. 초라한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킬까 무서웠고, 바닥을 뚫고 지하 나락까지 떨어진 자존심의 말로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회사 건물에서 벗어나 택시를 타고 집에 오는 내내 창 밖만 바라봤다. 한강 물 위에 내려앉은 햇살로 만들어진 윤슬이 아름답게 일렁였다.


집에 돌아와 이틀 정도는 마냥 빈둥거렸다. 종일 많게는 10통이 넘는 전화, 'ASAP'을 외치며 빨간 숫자로 경고장을 날리던 카톡 메시지들이 가득했던 하루가 한순간에 정갈해졌다. '앞으로는 000에게 연락하세요'라는 메시지를 던지는데 아쉬움은커녕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이쯤 되면 내 마음이 궁금하다. 혹시 이렇게 되길 내심 기대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누구보다 '나의 일'을 사랑하고, '소속감'이 삶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어느 회사에서건 불평불만이 있더라도 할 일을 하지 않거나, 빈둥거린 적은 없다. 오히려 더 열심히 해서 지금의 내 커리어를 점프 업 시키고자 노력했다. 그게 나와 회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고, 맞다고 여겼다. 하지만 처음으로 일과 회사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난 뭘 하고 싶고, 또 회사에서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인지.


뭐 하나 시원하게 답을 내리긴 힘들지만 적어도 타의적 백수를 맞이한 지금 이 시점에서 깊은 내면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는 점에서 짜릿함은 있다. 누구보다 '내'가 가장 중요한 시기다. 현재까지를 돌아보고 앞으로 계획을 세우고, 또 그걸 실현해야 하는 모든 주체가 바로 '나'.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진 지금은 어쩜 터닝 포인트의 기회이자 신의 선물일 수 있다.


이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지만, 크게 걱정은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 시련을 자양분 삼아 도약할 테니까. 자, 그럼 오늘부터 여름방학을 시원하게 즐겨볼까나. 이번 방학의 과제는 나라는 탐구생활 일지를 작성해 보는 것. 벌써 신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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