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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Oct 26. 2022

[덧붙임]백사마을의 시간

번외. 버스가 하루 두 번만 다니던 곳

백사마을 원주민들에게 마을 이름은 크게 두가지 뜻으로 통합니다. 하나는 '서울시 노원구 중계본동 산 104번지'란 단일한 주소를 갖는 '백사(104)마을'입니다. 우편배달부가 편지라도 전하려면 마을 입구부터 물어물어 집을 찾아야 했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허허벌판에 세운 마을'이란 뜻의 '백사(白沙·흰모래밭)마을'입니다. 서울 도심 개발에 내몰린 이들이 마을에 왔을 때 나무 한 그루 없는 빈 터였다는 증언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둘 다 백사마을이 겪은 소외와 빈곤의 시간을 담고 있는 이름입니다.

정확한 때는 알 수 없으나, 1964년 이전부터 수재·화재를 입은 이재민이나 철거민들이 백사마을 일대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대규모 이주는 1967년 청계고가도로 건설이 촉발했습니다. 서울시가 청계천변 무허가 판잣집을 철거하면서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백사마을로 이주시켰습니다. '불도저'란 별명을 지녔던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시내 무허가 주택 13만7000동 중 절반을 철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에 따라 용산, 서대문, 영등포 등 각지 철거민이 백사마을로 옮겨오게 됩니다. 서울시 기록에는 1967~1968년 모두 1180가구가 이주한 것으로 나옵니다. 백사마을은 봉천동, 거여동, 신정동 등과 같은 도시빈민의 이주정착지 중 하나였습니다.
1965년 서울 관악구 봉천동 일대 이주민 정착지 풍경. 백사마을에도 이즈음 비슷한 정착지가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 ⓒ<104마을; 중계본동 산 104번지>(2012), 73쪽
상계·중계동 일대가 지금이야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즐비하지만, 그 때는 중랑천변 마들평야의 일부였습니다. 그보다도 외곽에 있는 백사마을에 도로·수도 같은 기반시설이 있었을리가 없습니다. 이주민 네 가구가 한 천막 아래 지냈고, 한 가구당 8평씩 분필로 선을 그어 나눴다고 합니다. 버스가 하루 두 번 오갔고, 우물도 없어 개울물을 마셨을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1968년 7월16일자 <경향신문>은 '중계동 난민촌 2천여가구 주민 대표 50여명이 서울시에 몰려와 교통수단과 식수·하수구 문제를 해결해 달라며 농성을 벌였다'고 전합니다. 나중에 주민들은 정부가 지원한 시멘트에 진흙과 모래를 섞어 만든 블록을 쌓아 집을 지었습니다. 공동우물을 길어다 쓰다가 1980년대 들어서야 상하수도가 연결됐습니다. 1980년 중계동 104번지 주민이라고 밝힌 이정덕씨는 <동아일보> 독자난에 보낸 글에서 '쥐꼬리만한 수입에 방세를 제하고 나면 정말 살아나가기가 암담한 뿐'이라며 '청소, 배달, 도로공사, 또는 가내부업하청 그 어느 것이라도 일거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1980년대는 백사마을이 가장 번성한 시기였습니다. 갓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정치적 혼란기 수습책 중 하나로 대규모 아파트 공급을 준비하면서, 백사마을 같은 이주정착지 주민들에게 국공유지를 싼값에 넘겨 민심을 달래고 택지개발 재원도 마련하려고 했습니다. 하루아침에 토지주가 된 빈민들이 생겨났습니다.
1972년 백사마을 항공사진. ⓒ서울역사박물관·국토정보플랫폼
섬유제품 수출 증대와 맞물려 백사마을 곳곳에 들어선 ‘'요꼬(니트 편직)' 공장은 사람들을 유입시켰습니다. 어떤 공장은 요꼬기계를 수십대 놓을 정도로 컸다고 합니다. 공장 노동자들이 마을에 드나들들면서 식당, 다방, 옷가게, 신발가게, 쌀집, 정육점 등 상점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고 좌판이 깔렸습니다. 마을 입구가 시장통이나 다름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시끌시끌한 마을 풍경 너머로 재개발 논의도 덩달아 떠들썩해졌습니다. 토지 불하로 토지주가 된 이들이 1993년 처음으로 '개발추진위원회'를 꾸렸습니다. 2008년 개발제한구역 해제, 2009년 5월 재개발구역 지정 등 '뉴타운 바람'이 여기에도 미쳤습니다. 2011년 서울시는 전면 재개발이 아닌 필지·지형 일부를 남기는 '주거지보전' 방식을 택했습니다. 재개발 기대감이 부풀고 꺼지기를 반복한 사이, 토지주들은 대부분 마을을 떠났습니다. 개발에 걸림돌이 될까봐 빈 집에 세입자를 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연탄을 때는 마을에 도시가스를 들이자는 요구도 많았지만, 언제 재개발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선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백사마을은 여전히 서울 도시빈민의 몇 안 남은 둥지 역할을 했습니다. 1980~1990년대엔 마을에서 가까운 상계·중계지구 택지개발로 갈 곳을 잃은 철거민들이 밀려 들어왔습니다. 당시 월세는 1만~2만원 수준이었습니다. 2018년 기준 현 거주민 3명 중 1명은 1997년 IMF 외환위기 후에 마을에 들어왔습니다. 월세방의 80%는 보증금 500만원, 월세 20만원을 넘지 않을 정도로 저렴합니다. 현재 재개발 절차는 막바지에 다다랐지만 마을에는 아직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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