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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재 Oct 22. 2022

오늘

남자는 나의 말을 듣고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던 감정도 흐르던 눈물도 차츰 진정되어갔다.

가까이 다가가 거울을 바라봤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있다. 안정을 취하게 되자 마음속에서는 이 순간이야말로 정말 꿈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차올랐다. 김석우라는 남자도 흰이라는 여자도 단 한 번도 마주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나를 도와줄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중 대교에서 쓰러진 행인을 발견한 뒤 병원으로 데려갔었던 일을 기억하고 계신가요?"


다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중 대교라니,, 무슨 말을 하는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불현듯 사라져 버린 기억이 되살아나듯 그날의 상황들이 떠올랐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아픔보다 부모님의 보험금을 모두 날려버렸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더 힘들게 만들었다.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래서였다. 늦은 밤 마중 대교를 찾아갔던 것은, 죽으려고 했다. 그것 말고 다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런데 남자를 발견하게 됐다. 처음엔 어차피 죽을 건데 다른 사람을 신경 쓴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다리를 올라가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자꾸 남자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죽기 위해 찾아온 곳에서 다른 사람을 걱정하고 있는 나 자신이. 첫 번째 자살시도는 그렇게 어이없이 끝이 났다. 응급실에 도착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빠르게 현장을 벗어났다. 얽히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지만 내 주제에 누군가를 살렸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럴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묻는 것일까,


"그날 병원으로 실려갔던 남자는 한때   나가는 기업의 대표였습니다. 누구에게나 예상치 못한 시련이 찾아오듯이 남자에게도 마찬가지였죠. 잇따른 사업실패로 인해 죽을 결심을 했던 남자를 되살린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 단체는 알려지지 않은  비밀리에 운영되기 때문에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후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분야에는 우리와 다르게 공식적으로 알려진 봉사단체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그런 곳들에 정기적으로 많은 기부를 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도록 계속해서 남자를 지켜보고 있었고 남자를 구해낸 의뢰인을 알게  것입니다.  흥미롭더군요. 연달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사망보험금은 사기를 당하고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세상에 아무런 대가 없이 무언가를 건네거나 마음을 나누는 일들은 없습니다. 그 말은 정말 사실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계산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무언가를 주고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눌 수 있음에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기에 앞서 마음이 먼저 앞서는 사람, 의뢰인 역시 그런 사람인 것이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살려낼 가치가 충분하다고 느꼈습니다.

이제 조금은 궁금증이 풀리셨나요? 왜 당신이 선택되었는지."


'

"아들 엄마가 자주 말하는 게 무엇이지?"

 " '신뢰' 굳게 믿고 의지하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필요한 일. 엄마와 내가 놀이터에 가게 되면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때 쓰지 않고 순순히 돌아가는 것."


대화의 끝에는,

"세상을 살다 보면 속상한 일이 아주 많이 생길지도 몰라.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기도 하거든"

"왜, 상처를 주는 거야? 어른들은 바보라서 그런가. 나는 우리 달님반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잘 지내는걸?"

"그래 우리 아들이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을 거란 걸 엄마는 굳게 믿고 있어. 아들 말처럼 어른들은 바보라서 그런지 상처를 주기도 하고 또 받기도 한단다. 웃기지? 처음부터 안 그러면 될 텐데 말이야. 그런 일들이 자꾸자꾸 쌓이다 보면 '신뢰'라는 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거야. 믿을 수도 없고 의심하게 되고 계산적으로 변하게 되거든."

"엄마, 계산적으로 변한다는 게 뭐야?"

"음,, 친구에게 사탕을 나눠주면 이다음에 내가 다시 사탕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거지."

"그럼 계산적이지 않는 마음은 뭐야?"

"나에게 한 번도 사탕을 주지 않은 친구일지라도 소중한 사탕 두 개를 가지고 있을 때 아무 고민 없이 하나를 나눠줄 수 있는 마음이야."

엄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는 아들이 자라면서 많은 일들을 겪더라도 따뜻한 마음이 앞서는 어른으로 크면 좋겠어. 그거면 충분할 것 같아."


'

잠시 뒤 거울로 되어있던 벽면 한쪽이 열리더니 문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사이로 강아지 한 마리가 들어왔다. 처음 본 것 같은데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푸름이가 생각났다.

"오랜만이네요."

고개를 들자 내 앞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났다.

"어?"

첫 만남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이름을 말했다.

"제 이름은 김석우가 아니라 김주원입니다."

"제 이름 역시 흰 이 아니라 이다현이에요."

반가움이 들었지만 놀란 마음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각자가 원하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어요. 제 가명은 어릴 적 물놀이 사고로 죽은 형의 이름입니다. 형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였죠."

강아지는 신이 나는지 멈추지 않고 공간을 휘젓고 다닌다.

"중요한 부분을 빠뜨릴 뻔했네요. 강아지는 의뢰인이 동물병원으로 데려가 치료했던 그 강아지랍니다. 제가 입양을 했죠. 덕분에 좋은 가족을 만나게 됐답니다."

그제야 왜 강아지를 보았을 때 익숙함이 앞섰는지 알게 됐다. 누더기 같은 털들이 깔끔하게 정리된 탓에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반가움에 강아지를 안는 사이 여자는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시죠? 죽는다는 건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 "

민망한 웃음이 나왔다.

"네 그렇더라고요. 전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렸네요. 삼 개월 뒤에도 똑같이 말한다고 했었는데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여자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그것은 이런 모습마저도 예상을 했기 때문일까, 또 하나의 삶을 준 것에 대한 마음일까. 

그들은 나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다며 안대를 씌웠다.

건물을 빠져나와 차량에 올라탔다. 

도착했다는 말과 함께 안대가 벗겨졌다. 큰 나무 아래 공중전화가 보였다. 우리가 가장 처음 만난 장소 앞이었다. 두 사람은 내게 인사를 했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질문에는, 앞으로 두고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짧은 말을 남긴 채로 문이 닫혔다. 빠르게 차량은 골목길을 벗어나 언덕 아래로 사라져 갔다. 

건물을 나오는 동안 혹시 기억을 지우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런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에 나는 내가 이런 일들을 겪었다고 말하고 다니면 어떡하 하려고 그러냐고 되묻자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믿기나 할까요?" 

"아,, 하긴 그렇겠군요." 

"과거의 기억은 묻어두고 사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게 어제가 아닌 매일 새롭게 시작되는 오늘을 맞이하면서 말이죠."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았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던 나무의 모습도 어느새 가을에 가까워져가고 있다. 삼십여분을 그대로 보냈다.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 일 텐데 자꾸만 망설이게 된다. 정말 끝일까, 두 번 다시 그들을 만날 수 없는 것일까.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바지에 묻은 나뭇잎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스를 타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갔다. 몇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집에 도착했다. 이미 정리된 공간에는 소중한 것들을 담아 밀봉해둔 상자가 전부다. 집을 계약하고 들어왔던 날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공간 안에서 나는 새로운 꿈을 꿨었다. 상자의 테이프를 뜯어내고 내용물들을 하나둘 꺼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초인종이 울렸다. 두 번 세 번. 

찾아올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다가 집주인인가 싶어 재빠르게 입구로 향해갔다. 문을 열자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렸지만 지나가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요즘에도 이런 장난을 치는 사람이 있나 싶었다. 문을 닫으려던 찰나 바닥에 떨어져 있는 봉투를 발견하게 됐다. 봉투를 주워 안을 확인했다. 쪽지와 현금이 들어있다.


마지막으로 드리는 선물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세요. 

그 일에 열정을 쏟으며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빛나는 사람이 되어있을 테니까요. 


곧장 휴대폰을 들어 사이트에 접속한 뒤 파리행 티켓을 예약했다.

그래, 정말 가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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