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정규직 전환을 향하여
세 번째 회사 : 중소기업 C사(1)
세 번째 회사, C사는 중소기업이었다. 그곳에 나는 디자인 직무 인턴으로 입사하게 됐다. 중소기업이라 해도 규모가 꽤 큰 편이었고 유명세도 있었다. 언론에서 종종 조명받는 회사였다.
B사에서는 한 자릿수에 불과한 인턴 동기들이 여기에서는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입사 첫날, OT를 받기 위해 인사팀에게 안내받은 세미나실에 들어갔는데 문을 열자마자 공간을 가득 메운 이들이 보였다. 전부 C사 인턴들이었다. 저들은 내 입사 동기이자 정규직 자리를 두고 싸울 경쟁자였다. 든든함과 불안함, 이 어긋난 감정을 함께 가지며 빈자리에 앉았다.
C사의 정규직 전환율은 대략 30%에서 50% 사이였다.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내놓은 정보는 아니었지만 C사를 거쳐 간 전 인턴들이 남긴 후기에는 대체로 그리 적혀 있었다. 그 말인즉슨 절반 이상의 인턴이 떨어진다는 소리였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C사 후기에는 대체로 안 좋은 이야기들이 많았다. 공정치 못한 평가로 합격의 당락을 나눈다, 정규직 전환은 사실상 희망 고문이다 등과 같은 내용이 주였다.
그 때문에 취업 사이트에서는 한때 C사가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여길 지원해봤자 소용없다더라, 차라리 다른 곳에서 인턴 하는 게 낫다더라 라면서 말이다. 가뜩이나 뇌종양 때문에 편치 못한 마음이 그런 말들 때문에 더욱 심란해졌다.
C사 인사팀도 해당 이슈를 의식하고 있던 모양인지, 본격적으로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하기 전 전환율에 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올해 C사는 작년과는 다르게 최대한 많은 인턴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예정입니다.”
긍정적인 소식이었으나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가 손을 들고 전환율이 몇 퍼센트냐고 물을 때 인사팀이 그건 팀마다 달라 확답을 줄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전원 합격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쉬이 기뻐할 수도 없었다. 오로지 한 명만이 떨어진다고 쳐도 마찬가지였다. 그 한 명 안에 내가 들어갈 수 있었다.
이미 경쟁은 시작된 것이다. C사 건물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나는 모두의 평가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 정신을 차려야 했다. B사를 다닐 때보다도 더욱 치열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하지만 행동은 그런 이성적이고도 논리적인 사고를 쫓아가지 못했다. 예전처럼 무작정 성실하게 회사에 다니기에는 내 머릿속엔 정체불명의 2.7cm 종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건 내 일상을 뒤흔들 폭탄이 될 수도, 혹은 단순 해프닝으로 그칠, 그래서 술자리에서 심심풀이 차 꺼내는 이야기의 소재거리로 남을 수도 있었다. 나는 오로지 후자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며 회사에 다녔지만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 요즘 나는 모든 게 부질없게 느껴졌다.
원래 운이 안 좋다며 내 뇌종양을 쉬이 받아들였다만, 곰곰이 돌이켜보니 그 표현에는 어폐가 있었다. 본디 불운하다니. 그런 게 세상 천치 어디에 있나?
세상 모든 일을 행운과 불운으로만 요령껏 분류할 수 있다면, 불운한 이는 기분은 거지 같더라도 생각 없이 살기에는 퍽 편했을 것이다. 그냥 이뤄지는 일보다는 무슨 원인이 있어 이뤄지는 일이 더 많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뇌종양이 있단 진단을 받고 나서 며칠 뒤에 그 원인을 찾으려 들었다.
물어보니 MRI 병원에서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산부인과 병원에서도 원인이 워낙 다양해 모르겠다고 했다. 인터넷 의학 전문 사이트에 검색해 봐도 뚜렷한 원인을 찾기 어렵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탐색을 포기하려던 차, 우연히 두 개의 단서들을 포착했다. 하나는 스트레스의 악영향과 또 다른 하나는 우울증약의 부작용이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프로락틴 수치가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또한, 특정 우울증약에는 프로락틴 수치를 높이는 부작용이 있다고 했다.
이것만으로 확신할 수 없지만 인과 관계가 뚜렷하긴 했다. B사를 다니면서 스트레스를 받았고, 우울증에 걸렸고, 그래서 우울증약을 복용했고, 지속적인 스트레스 영향과 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프로락틴 수치가 올라갔고, 끝내 뇌종양이 생겼다. 어떤가. 제법 깔끔한 인과성이 아닌가.
어쩌면 B사 입사 전부터 뇌종양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B사와의 연결고리가 말끔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뇌하수체 종양의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가 생리 중단이었고, 그 현상을 B사에 다니면서부터 생전 처음 겪어봤으니까. B사 재직 중 뇌종양이 새로 생겼든 아니면 뇌종양의 병세가 깊어졌든. 어쨌든 그 둘 중 하나에 속하는 건 명백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비로소 무언가가 잘못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행보를 새삼스럽게 뒤돌아보았다.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고, 일만 미친 듯이 하고, 신경 안정제를 복용하며 초조함을 감추려고 했던 지난날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는 게 정말 맞나? 나는 정말 나를 위해주며 살았던 걸까?
그 의구심은 현 상황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됐다. C사에 입사하고 나서 나는 야근을 밥 먹듯이 하게 됐다. 물론 B사만큼의 가혹한 근무 환경이 요구되지는 않았다. C사에는 특이하게 자율출퇴근제도가 있었고 때문에 반드시 C사 사무실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6~7시 이후면 알아서들 귀가해 알아서들 집에서 회사 일을 이어가면 될 일이었다. 와, 이 얼마나 대단한 근무 환경인지!
퇴근 후 재택 업무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이 C사의 모든 단점을 상쇄해주지는 못했다. 과로는 결국 과로였다. 나는 주말에도 컴퓨터 앞에 앉아 디자인 작업을 했다. 눈은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방아쇠는 이미 당겨졌다. 레일 위의 선수들은 맹렬히 달려나갔다. 나도 정규직 전환이라는 골인 라인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고 있었다. 아무리 바람이 거세게 불고,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워도 멈춰서는 안 됐다.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됐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달려야 했다.
하지만 요새 나는 자꾸 멈칫했다. 달리는 속도를 늦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앞만 보는 게 아니라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았다. 온 사방을 흘금대면서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해야 할 바와 내가 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런 나날을 보내니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C사에서 남은 계약 기간은 이제 2개월이었다. 그리고 곧 대학 병원 진료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