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이란 긴 기다림이 끝났다. 예약 날, 오전 반차를 내고 대학 병원으로 갔다. 예약 시간이 되자 담당 교수님 진료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드디어 진찰받는다는 기쁨을 온전히 느낄 새도 없이 담당 교수님으로부터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되었다.
"종양이 혈관을 타고 들어가서 수술 못 해요. 잘못 건드리면 좀 위험한 위치거든요. 우선 약이 잘 듣기를 바라보죠.“
한 달을 기다리면서 나름 여러 가지 내용을 상상했고 답할 거리를 미리 생각해냈다. 당장 수술해야 한다고 말하면 나는 C사 인턴생활이 끝날 때까지 미루겠노라 답할 생각이었다. 혹은 수술 진행 방식에 대하여 의견을 묻는다면 내시경 수술로 진행하고 싶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수술을 못 한다는 이야기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돌연 뒤통수에 한 대를 얻어맞은 듯했다.
충격에 아무런 반응 없이 앉아만 있었더니, 교수님은 뇌하수체 종양은 어차피 약이 잘 듣는 질병이니 벌써 걱정할 필요가 없단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런 긍정적인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머릿속에는 '위치가 안 좋다고? 그래서 수술이 안 된다고?'란 생각만 도돌이표처럼 맴돌았다.
그 후 약국에 가서 커버락틴이라는 약을 처방받았다. 양은 총 3개월 치였다. 3개월 뒤에 효과 유무를 살피고자 다시 진료를 보기로 했다.
어느덧 반차를 낸 시간이 다 되어갔다. 나는 병원 1층에 있는 제과점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서 회사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휙휙 바뀌는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어쩐지 B사를 다니던 때가 생각이 났다. 정신과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은 지금과 같이 날씨가 화창했고 하늘이 푸르렀다. 다만, 생각하는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자동차 바퀴를 바라보며 현실도피를 하려 했다면, 또는 모든 인내심을 끌어올려 현실을 이겨내려 했다면, 지금은 내 마음속을 들여 보기만 했다. 머릿속이 지끈거릴 때까지 나와 관련된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있었다.
내가 해야 할 바는 무엇일까? 이건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명확했다. 남은 2개월 동안 C사 업무를 누구보다도 잘 수행하는 것, 주어진 인턴 과제도 잘 끝마치는 것. 그로 인해 정규직이 되는 것.
반면 내가 하고 싶은 바는 무엇일까? 이건 명확하지 않았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하고 싶은 일들을 줄줄 써내려갈 수 있긴 했다.
온전히 내 힘으로만 자립 생활을 이어가기, 야근하지 않고 편하게 살아가기, 맛있는 걸 먹고 다니기, 창작 활동을 해보기,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내보기, 내가 하고 싶은 업무만 받고 살기, 예쁜 옷을 입고 돌아다니기, 집 안 인테리어를 새로 하기 등이 있겠다.
쓰라면 더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자문은 공상과도 같지 않은가. 마치 어린아이가 제 장래희망을 공룡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사회에 나온 성인이었고, 장래 희망란에는 생계를 책임질 직업명을 또박또박 적어야 할 나이였다.
그걸 알면서도 다른 인턴들을 제칠만한 노력을 쏟지 않았다. 주어진 업무는 성실히 수행하긴 했다. 빠듯한 마감 일정을 어떻게든 맞추기 위해 야근을 꾸준히 해왔고 주말에도 빈번히 일했다. 업무 때문에 새벽에 잠을 자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한 열정일 것이다. 다른 인턴들에 비해서.
-여기까지 미리보기입니다- 혹시 나머지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책<과로사 할래? 퇴사 할래?>에서 감상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