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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of
Future Writers

by 우진우 Aug 16. 2022

15. 퇴사 날 결심했다. 나는 행복해질 거라고.

세 번째 회사 : 중소기업 C사(3)

 "죄송해요. 사실 제가 진우 씨 평가를 안 좋게 드렸어요."


 내가 멍하게 있는 사이, 팀장님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다음 말을 꺼냈다.


 “그것 때문에 떨어졌을 거예요."

 “네?”


 어떻게든 동요를 감추고 싶어서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공연히 입술을 끌어올려 보았다. 내 어설픈 미소가 보이는 건지 안 보이는 건지, 팀장님은 계속해서 내 채용 비화를 잔뜩 말해주었다.


 “제가 그런 평가를 준 이유는요... 회사에서의 모습이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럼 즐겁겠나요? 3개월 내내 야근하느라 피로에 쩔었는데?’라고 날카롭게 반문했다. 물론 속으로만이었다.


 “성격도 회사 분위기와 맞지 않는 거 같아요.”


 그럼 입사 전에 MBTI 검사를 보시던가요!


 “속도가 느려서 기다려 줄 수 없었어요.”


 마감 일자가 빠른 건 아니고요?


 “작업 스타일이 저희 회사와도 맞지 않았어요.”


 제 포트폴리오를 보고 뽑은 건 팀장님이시잖아요!


 팀장님은 이 뒤로도 한참 나의 단점에 대해 말을 하였다. 요점은 내 전부가 C사와 맞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성격부터 작업 스타일, 업무 속도까지. 그 모든 것이!


불합격 연락을 받은 순간에도 평정심을 유지했던 마음이 팀장님 말에는 속절없이 꺾일 거 같았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괜히 딴지 걸듯 속말을 건네봤지만,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완전히 억누르기엔 역부족이었다. 팀장님이 바르르 떠는 내 등을 툭툭 쳤다. 마치 위로의 손짓처럼 말이다. 감정을 삭이느라 바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회사에서의 내 모습이 비록 최고가 아니었을지라도 최선은 다하는 사람이었을 거라고 굳게 믿어왔다. 지난 3개월은 내 개인사를 빼놓고 말하더라도 힘든 나날이었다. 평가라는 미명하에 던져진 업무량은 인턴 개인이 소화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그래도 전부 마감 기한 내에 끝내고자 노력했고 실제로도 마감 내에 끝냈다.


인턴 후반에 탈락을 예감하면서도 게을러지지 않았다. 어떤 순간이든 최선을 다하고 싶단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 행동과 의도가 어떻든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결과가 좋지 못하면 저런 무례한 이야기를 면전에서 듣게 되는데.


 잠시나마 회사의 소속이었고 이제 곧 나갈 외부인에게 왜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까? 한 사람의 모든 면을 부정하면서까지 말해야 할 것들이었을까?


 이해는 안 되지만 굳이 이해해보자면 진실을 토로함으로써 팀장님 본인의 죄책감을 좀 덜고 싶었던 건 아닐까. 더불어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말라고 내게 조언도 할 겸 말이다.


 ‘네가 떨어진 건 C사 탓도, 내 탓도 아니야. 오로지 너의 탓이지. 그러니 노력해.’


 결국, 팀장님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역지사지를 전혀 못 하는 팀장님을 위해서 내 입장에 대해서도 상세히 고하고 싶었으나 그만두었다. 내가 답할 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으므로.


 "네. 저도 그러한 부분을 인지하고 있었고, 잘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그만큼 성장하지 못했던 거 같습니다. 그 부분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하지만 마무리가 아름답기보다 끝내 구차했다. 감사를 전하는 목소리는 거칠었고, 팀장님을 향한 눈에는 기어이 물기가 어른거리는 까닭이었다. 수치스러웠다. 비참했고.


 팀장님과의 면담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로부터 하루가 지났고, C사 인턴 계약 만료일이자 퇴사일이 찾아왔다.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라 사무실에는 직원들이 많지 않았다. 내 직속 사수도, 팀장님도 사무실에 나오지 않고 재택근무를 했다. 나는 남은 휴가 쓰기 위해 오후에 반차를 냈다. 그래서 오전까지만 회사에 있으면 됐다. 오전 중으로 빠르게 업무를 마쳤고 출근한 지 얼마 안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퇴근 시간이자 퇴사 시간이 벌써 다가온 것이다.


빈자리가 듬성듬성 나 있는 사무실 주위를 빙 둘러 다녔다. 합격한 인턴 동기에게, 불합격한 인턴 동기에게, 얼굴만 아는 C사 직원에게, 그리고 같은 팀 소속인 C사 직원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몇 사람들이 마중을 나오겠다며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 나왔다. “수고했어요.” “고생 많았어요.” “잘 되시길 바랄게요.” “더 좋은 회사에 가실 거예요!” 그들의 덕담과 위로가 쏟아 나왔다. 나는 희미한 미소로 답했다.


 C사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오래 걸리는 시간은 아니지만, 환승을 세 번 거쳐야 했다. 늘 그렇듯 마을버스에 몸을 실었다가 도중에 내려 지하철에 탑승했다. 그러다 다른 호선의 지하철로 옮겨 탔고 또 도중에 갈아탔다. 보통 여러 노래를 들으면서 그 지루한 과정을 버티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노래 하나만을 계속 들었다. 페퍼톤스의 <drama>라는 노래였다.


페퍼톤스 <drama>

 
 경쾌한 기타 소리와 힘찬 여성 보컬의 조합이 좋은 노래였다. 멜로디는 반복적이었고 가사 또한 그러했다. 후렴구에 가서는 조금의 변주도 없이 똑같은 문장이 되풀이됐다.


 [이대로 놓칠 수 없는 건 무엇입니까. 언제라도 찾아 헤맸었던 건 무엇입니까.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 누군가의 big drama.]


 노래를 들으면서 3개월 전의 일을 곰곰히 떠올려보았다.


산부인과 병원 의사에게 처음 전화 받았던 그 날, 나는 무척 두려웠다. 지금은 뇌하수체 종양이 시한부 선고를 받을 만큼 무서운 질병이 아니란 걸 알고 있지만, 의학 상식이 전무한 내가 당시에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손은 두려움에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언제 적 보았던 뇌종양이 대한민국 사망 원인 1위 질병이란 통계표를 잊으려 들었다. 마냥 겁이 났다. 믿지도 않은 신을 무작정 원망했다. 그리고 후회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난 그렇게 살지 않았을 거야, 라고.


 돌이켜보니 나는 이유가 참 많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무엇이든지 간에 내가 하는 일에 강박적으로 이유를 붙여야만 했다. ‘이걸 왜 해?’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때에 따라 다음과 같이 답하곤 했다. 좋은 대학을 가야 하니까, 성공적인 취업을 해야 하니까, 제대로 된 인턴 경력을 가져야 하니까, 정규직이 돼야 하니까, 다들 그렇게 사니까, 나도 남들처럼은 살아야 하니까....


내 감정보다 그럴듯한 이유를 우선시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관철하기보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을 고집했다. 그래서 내 행복은 쉽게 무너졌고 내 기호는 더는 내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한때 그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어린아이 같은 공상을 더 이상 하지 않는 나 자신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이거 하고 싶어!’라며 겁 없이 트랙을 벗어나는 이를 향해 은근한 조소를 날리기도 했다.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은 꼭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죽음이란 단어가 내 일상에 껴든 순간, 나를 단단히 감싸던 껍데기가 허울처럼 부서지고 명명백백한 진심이 드러났다. 껍데기 안에는 자부심 따위는 없었다. 후회만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여전했다.


 [이대로 놓칠 수 없는 건 무엇입니까. 언제라도 찾아 헤맸었던 건 무엇입니까.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 누군가의 big drama.]


 이 노래 가사는 마치 내 자문과 닮았다.

물음을 거듭 던지는 가사처럼 나도 C사를 다니는 내내, 내가 해야 할 바와 내가 하고 싶은 바를 생각하며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어디에 무게를 둬야 할까? 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저울질을 할 필요는 없었다. 3개월 전 그날부터 이미 답은 나와 있으니까.


 어린아이같이 굴어서 뭐 어떤가. 장래희망란에 영 생뚱맞은 걸 적는다 해서 뭐가 어떻단 말인가. 내 마음대로 행동한다고 해서 세상은 멸망하지 않는다. 한없이 평화로울 것이다. 우울증에 걸렸던 때에도, 뇌종양에 걸렸던 때에도, 세 번째 퇴사를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창 너머 보이는 저 하늘은 푸르렀다. 내가 무얼 하변함이 없다면, 오히려 나만이 괴로울 뿐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이제부터 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도 된다.


 너무 단순한 사고인가?


 그래도 괜찮다고 집요하게 자신을 설득해보았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깊이 생각하지 말고 줄줄 써 내려가면 된다. 그걸 하나씩 하나씩 이루면 된다. 반면, 하기 싫은 일이 있다면 하지 않으면 된다.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쳐도 된다. 그렇게 나는 살아가면 된다. 언젠가 정말로 죽음의 그림자가 내 삶에 드리우는 순간, 다시는 후회라는 감정이 떠오르지 않게 말이다.


단순무식한 행보가 내 행복으로 이어지는 길임을, 그 당연한 정답을 나는 세 번째 퇴사 길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나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화답하듯 중얼거렸다. 행복해질 거야, 나는 행복해질 거야 라면서.



중소기업 C사 인턴 후기

한 줄 평 : “배우기보다 깨우치는 시간들.”
 

-사내식당 *** (음식 맛과 양이 적당했다.)
-시설 *** (세미나실이 좋았다.)

-복지 *** (야근 수당은 B사 때와 마찬가지로 없었지만, 식비를 지원해줘서 감사했다.)

-장비 *** (기본 장비를 줘 편안히 작업했다.)

-사내 분위기 *** (자유로우면서도 보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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