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그림 14일 차_기초 콘티 제작

2025년 07월 03일 목요일

by 그래

내가 할 수 있을까? 오늘 수업을 앞두고 걱정이 되었다. 네게 글 쓰는 일이 적성에 맞는 이유는 나 혼자 계획하고, 나 혼자 쓰며 나 혼자 출간까지 생각하면 끝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회의니 뭐니 하는 건 딱 질색이다. 직장 생활이 무사히 끝난 이유는 나의 이런 특성을 고려해 준 선임의 배려 덕이었다. 어느 직장을 가더라도 혼자서 다하려는 성격 때문에 늘 혼자 맡아하는 일을 했다. 시작과 끝이 내가 다 할 수 있으면 힘든 일이라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오늘이 콘티 제작이다. 설명 내내 다른 사람과 협력을 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말할 때마다 괜한 두통이 몰려왔다.


그러나 설명을 듣고 나니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는 이 작업이 꼭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글을 쓸 때 특히 긴 글을 쓸 때는 시놉시스를 만든다. 기승전결, 각화의 중요 내용까지 꼼꼼하게 짜야 글이 흐트러지지 않고, 끝까지 마무리가 가능하다. 이 콘티 제작은 글에서 시놉시스와도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부터는 수업이 평안하게 느껴졌다.


제일 먼저 6칸의 네모를 그리고 어떻게 표현할지 글이나 대략적인 그림으로 표현하라고 했다. 내가 선택하는 것은 시화였다. 그림을 배우기로 마음먹은 이유도 시화를 그리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선택했고, 선생님은 흔쾌히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그릴 시화는 나의 자삭 시다.

샘플 시는 내가 아루하의 시라는 매거진에 연재한 [종이배는 너였다]라는 시였다.

종이배는 너였다

이 글은 이미지를 이미 머리에 있는 상태에서 섰다. 도장 캐릭터를 어디에 넣을지까지 염두하고 쓴 거라 콘티는 나에게 무의미한 작업이었다. 그런데도 하고 싶었다.


선생님은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콘티 제작 시 자료화면을 찾아보지 말라고 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표현해 보라고 했다. 자료화면으로 뭔가를 찾으면 거기에 매여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 점은 나도 공감했기에 컴퓨터는 글만 보고, 다른 것은 일절 보지 않았다.


KakaoTalk_20250828_000121979_01.jpg 수업 중 생각한 6개의 콘티


내가 생각하는 시화는 그림보다는 글이 우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림은 부연이어야 하며 들어가는 글도 디자인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그렇기 제목을 어디에 둘지 내용을 어디에 어떻게 넣을지 다양한 각도로 접근했고, 그렇게 여개의 시안이 나왔다. 의외로 처음 구상했던 콘티가 아니라 이날 새롭게 떠올린 시안이 더 좋아 보였다.


그래서 완성한 그림이 다음 그림이다.

KakaoTalk_20250828_000121979.jpg 콘티 작업 후 그린 시안

역시 사람은 어렵다. 그림 초보가 사람과 풀과 물과 흐르는 장면과 아이의 다양한 자세하 아련하고, 처연한 손동작을 모두 표현하기엔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래도 나름 선방은 했다고 생각한다. 제일 글과 어울리는 그림이 나왔으니 말이다. 조만 칸 디지털 드로잉을 배우면 내가 표현하고 싶은 이 모든 장면이 현실이 될 것 같다는 괜한 자신감도 한 몫했다.


선생님은 잘 그렸다고 칭찬했지만, 노력을 칭찬한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기꺼이 웃으며 감사하다고 전했다. 2시간 수업시간 동안 쉬지 않고, 그렸으니까 노력은 가상하지 않은가.


그리 생각하며 나도 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이미 수업 중에 완성한 난 과제는 없다. 그런데도 잊을까 새로운 시화를 준비했다.

20250704_1280_1751559444022.jpg
KakaoTalk_20250828_001549411.jpg
콘티 6장과 원본글


[세상은 너의 것이다] 글은 1집 시집에 있는 글과 사진이다. 당시 아가씨였던 지인이 사진이 잘 나왔다며 보여 준 건데, 보자마자 글귀가 떠났다.


발끝에 벼랑이 두렵더라도
아래를 보지 말고 먼 산을 보라
너의 시선이 닿는 곳이 네 꿈이 있을 것이고
너의 숨이 닿는 곳이 네 삶이 있을 것일 테니


무려 3년 전 글이다. 사실 쉬울 거라고 생각하고 선택했다. 이미 구도는 나와 있는 것이었고, 시화 아닌 글귀이기 때문에 글에 집중하면 아무래도 쉽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콘티를 짜면서 선생님이 자료화면을 보지 말라는 뜻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사진에 갇혀 새로운 콘티를 짜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할지 진짜 심각하게 고민했다. 결국 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와서야 콘티를 정했고, 거기에 따라 그렸으나 역시 사람이 제일 큰 문제고 난관이었다.

KakaoTalk_20250828_002844390.jpg 과제

원래는 2층으로 되어 있는 건물 위에서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을 그려야 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잡으려 했으나 이 또한 실패했다. 무엇하나 만족하지 못해 어디에 내놓지 못하고 이 공간에만 남겨 둔다.


완성하지 못한 또 하나의 작품도 있다.


KakaoTalk_20250828_002413384.jpg
KakaoTalk_20250828_002310021.jpg

이 글을 같이 수업 중인 학생의 그림을 보고 쓴 것이다. 무언가를 잡고 있는 듯한 손을 보고 썼는데.. 아무리 그려도 그와 비슷한 느낌을 낼 수 없어 포기했다. 물론 콘티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말이다. 이건 콘티만 만들어 준 체 끝났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릴 지도 모르겠다.



keyword
이전 13화연필그림 13 일차_초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