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의 <면도날>

영화 <면도날The Razor’s Edge> 1946년

by 노용헌

<인간의 굴레에서>, <달과 6펜스>와 함께 서머싯 몸의 소설 <면도날>의 주인공 래리는 공군 조종사로 1차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만난 친한 동료가 죽고 난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프랑스의 탄광, 수도원, 독일의 농장, 스페인과 이탈리아 곳곳을 거쳐 인도의 아슈라마로의 여정을 통해서 자신의 열망과 생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우리에게 인생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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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카타 우파니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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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표현하기가 참 힘들어. 표현하려고 하면 혼란스럽기만 하고. 어떤 땐 이런 생각이 들어. ‘이런 것 저런 것을 고민하는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내가 거만하고 몹쓸 인간이라서 그런 걸지도 몰라. 나도 남들 가는 길을 가면서, 그럭저럭 세상사에 순응하면서 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말이야. 하지만 한시간 전까지만 해도 쌩쌩하던 녀석이 죽은 모습으로 누워 있던 게 떠올라. 그러면 얼마나 잔인하고, 얼마나 무의미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산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삶이란 눈먼 운명의 신이 만들어 내는 비극적인 실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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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두 달간은 스피노자를 읽었어. 아직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굉장히 흥미로웠어. 산악 지대에 있는 넓은 고원에 비행기를 착륙시키고 내려선 기분이야. 마치 와인을 마시고 취하는 것처럼 고독감과 맑은 공기에 취하지. 정말 흥분되고 행복한 기분에 젖게 돼, 어쨌든 지금은 시카고로 돌아갈 수 없어. 이제 막 뭔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니까.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정신세계가 나를 부르고 있어. 난 그 세계를 여행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해."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확실히 알고 싶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도. 또 내게 불멸의 영혼이 있는지, 아니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지 알고 싶어." "하지만 래리, 그런 질문들은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물어 온 것들이잖아. 만약 해답이 있다면 벌써 밝혀졌을 거야." (p117)


"도덕주의자들은 성적 본능이 사랑과는 크게 상관없다고 주장해 왔어. 그들의 얘길 듣고 있으면 사랑이 마치 일종의 부수현상(附隨現象)처럼 느껴지지."

"부수현상이란 게 대체 뭐예요?"

"의식이 그 자체로 두뇌 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그저 두뇌 작용을 수반하고 두뇌 작용에 의해 결정되는 그 무엇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심리학자들이 있어. 그러니까 의식은 수면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처럼 나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나무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논리지. 나 역시 전적으로 같은 생각이야. 성적인 열정 없이 사랑이 존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지. 간혹 열정이 죽은 후에도 사랑이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 일테면 애정이나 온정, 혹은 취향이나 관심사의 공유, 아니면 습관 등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거야. 그중에서도 습관일 가능성이 높지. 평소에 밥 먹던 시간이 되면 배가 고파지듯이 성관계도 습관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어. 물론, 사랑이 없어도 욕망은 성적 본능에 따른 자연적인 결과라구. 인간이라는 동물이 가진 다른 기능과 똑같은 거지. 그러니 남편들이 적당히 때와 장소를 봐 가면서 시시덕거리는 걸 갖고 여자들이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그게 꼭 남자들한테만 해당된다고 할 수 없죠."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이사벨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쪽에 들어맞는 거라면 저쪽에도 들어맞는다고 말이야. 하지만 한 가지 반론을 제기할 순 있어. 남자한테는 스쳐가는 관계가 감정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지만 여자한테는 어느 정도 의미를 줄 수 있거든."

"여자라고 다 그런 건 아니에요."

나는 말을 끊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 열정이 아니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다른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거야. 그리고 열정은 서로 만족할 때 커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장애가 있을 때 더욱 커지는 법이지. 키츠가 그 송가에서 그리스 항아리에 그려진 사람,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용감한 연인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한 건 무슨 의미였을까? '영원히 사랑하라, 그녀는 영원히 아름다우리.' 왜 이런 말을 했을까? 바로 그녀가 쟁취하기 어려운 상대이기 때문이지. 그가 아무리 열렬하게 그녀를 갈망해도 그녀는 닿을 수 없는 상대야. 둘 다 대리석 항아리에 새겨진 상태니까. 내 생각엔 그리 대단한 예술 작품도 아니었을 것 같지만 말이야. 래리에 대한 네 사랑도, 너에 대한 래리의 사랑도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사랑이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단순한 거야. 다행히 네 경우엔 비극적인 결말을 맺진 않았지. 너는 부유한 남자와 결혼해서 잘 살았고, 래리는 세이렌이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밝혀내기 위해 세상을 떠돌아다녔으니까. 너희 둘 사이엔 열정이 개입되지 않았어."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열정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파스칼은, 가슴은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있다고 말했지.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건 열정이 가슴을 사로잡으면 가슴은 사랑을 위해 세상을 잃어도 좋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그럴듯한, 심지어는 결정적인 이유들을 만들어낸다는 뜻이야. 그래서 명예를 희생시켜도 좋고 치욕도 그리 큰 대가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지. 열정은 파괴적인 거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넬과 키티 오셰이도 결국 열정 때문에 파멸로 치닫고 말았잖아. 그리고 열정은 무언가 파괴하지 않으면 소멸해 버려. 그러고 나면 수년 동안 인생을 허비했다는 걸 깨닫고 비참한 기분이 들겠지.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면서 무서운 질투의 고통을 견뎌 내고 그 모든 쓰디쓴 치욕을 삼켜야 하는 순간이 올 테니까. 자신이 가진 애정을 전부 가난한 매춘부한테 소진했음을, 어리석고 하찮은 존재에게 자신의 꿈을 모두 걸었음을, 껌 한 쪽만도 못한 상대에게 영혼을 전부 쏟아부었음을 깨닫는 비참한 순간이 찾아오는 거지." (P278-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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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예수가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한 것 기억나나? 그가 한창 굶주려 있을 때 마귀가 와서 이렇게 말했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이 빵으로 변하게 하라.' 하지만 예수는 그 유혹을 거부했어. 그러자 이번에는 마귀가 그를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말했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려라.' 천사들이 보호를 받고 있으니 그들이 받들어 줄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이번에도 예수는 거부했어. 그러자 마귀는 그를 높은 산으로 데려가서 천하만국을 보여주고, 네가 만일 엎드려 경배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지. 그러자 예수는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했어. 간략하고 교훈적인 마태복음에 따르면, 이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교활한 마귀는 또 한번 예수에게 가서 이렇게 말한 거야. '만일 네가 치욕과 불명예, 태형, 가시면류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면 너는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한 인간이 친구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을 테니 말이다.' 결국 예수는 지고 말았어. 마귀는 옆구리가 아프도록 웃어 댔지. 사악한 인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죄를 범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야."

이사벨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대체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으셨어요?"

"어디서 듣긴, 지금 방금 지어낸 얘기야."

"엉터리예요. 불경스럽다구요."

"난 단지 자기 확신이 얼마나 강력한 열정이 될 수 있는지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정욕도, 굶주림도 그 옆에서 아주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지.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면 그것으로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단정 짓게 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어. 그 확신의 대상은 중요하지 않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 어쨌든 그것은 그 어떤 술보다도 중독성이 강하고, 그 어떤 사랑보다도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또 그 어떤 악덕보다도 강력하고 매혹적이야. 사람은 자신을 희생시키는 순간 하나님보다 훨씬 더 위대한 존재가 되지. 왜냐면 전지전능한 하나님도 자신을 희생시키진 못했으니까. 기껏해야 자신의 독생자, 그러니까 예수만 희생시켰지."

"오, 하나님! 정말 지겨운 얘기네요."

나는 아랑곳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 열정에 가로잡힌 래리에게 상식이나 분별력 따위가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느냐는 말이지. 넌 래리가 그 오랜 시간 동안 무얼 찾아다녔는지 몰라. 나 역시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확실하게 알진 못하지. 그는 수년동안 육체 노동을 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았지만, 그것들도 지금 그가 느끼는 욕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사실 그건 단순히 욕망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한 정도지. 그보다는 마치 아우성치는 듯한 절박한 욕구야. 순수한 아이로만 알고 있던 여자가 타락한 것을 보고 그 여자의 영혼을 구하고픈 욕구에 사로잡힌 거야. 이사벨 말이 옳아. 나 역시 래리가 지금 가망도 없는 일을 하려 드는 거라고 생각해. 래리는 섬세하고 예민한 친구야. 그러니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맛보았겠지. 그가 계획한 평생의 과업들, 그게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들 역시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테지. 비열한 파리스는 아킬레우스의 발뒤꿈치를 쏴서 죽였어. 래리에겐 그런 냉혹함이 없지. 성자라고 해도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하는 그런 냉혹함 말이야." (P346-348)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공포를 안고 살다니 정말 놀라웠습니다. 폐쇄공포증이나 고소공포증 같은 게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 심지어는 삶에 대한 공포, 그런 것들이었어요. 건강하고 부유한 사람들, 그러니까 걱정이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더군요. 가끔은 그것이 가장 끈질긴 인간의 고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곤 이런 의문이 들기도 했죠. 그것이 어떤 깊은 동물적 본능, 즉 인간이 삶에 대한 전율을 처음 느낀 원시 생명체로부터 받은 동물적 본능에 기인한 것은 아닐까? (p408)


“애초에 해답이 없었을 수도 있고 제가 모자라서 끝내 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죠. 라마크리슈나는 이 세상을 신의 장난으로 보았어요. ‘그것은 유희와도 같으며, 그 유희에는 기쁨과 슬픔, 미덕과 악덕, 지식과 무지, 선과 악이 존재한다. 삼라만상에서 죄와 고통이 모두 제거되면 그 유희는 끝은 맞는다’라고 말했죠. 하지만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런 생각을 거부하고 싶습니다. 제가 주장할 수 있는 건, 절대자가 이 세상에 그 자신을 현현했을 때 선과 악이 본질적인 상관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거예요. 지각변동이라는 상상하기 힘든 공포가 없었다면 히말라야 산맥의 장관은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겁니다. 중국의 장인들은 얇은 도자기로 예쁜 모양의 꽃병을 만들어 거기에 아름다운 디자인을 넣고 멋지게 색칠한 다음, 완벽한 광택을 추가하죠.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꽃병도 그 본질적인 속성 때문에 쉽게 깨질 수밖에 없어요. 바닥에 떨어뜨리면 산산조각이 나고 말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도 오직 악과 결합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서머싯 몸, 면도날, P461-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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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이야기를 끝내려 한다. 그 이후로 나는 래리에 대해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고, 들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평소에 자신이 말 한 것은 꼭 지키는 친구였으니, 미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정비소에 취직했다가, 그다음에는 트럭을 몰면서 너무 오랫동안 떠나 있었다는 조국에 대해 원하는 만큼 배웠을 것이다. 이것을 모두 끝낸 후에는 택시를 모는 환상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겼을 게 분명하다. 그 뒤로 나는 뉴욕에서 택시를 탈 때마다 운전수를 흘끗흘끗 보는 버릇이 생겼다. 래리의 진지한 미소와 움푹 들어간 눈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는 야망도 없고 명예욕도 없다. 어떤 식으로든 유명해지는 것은 그가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선택한 삶의 행로를 따르며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는 데 만족할 것이다. 그는 겸손한 성격 때문에 자신을 타의 모범으로 내새우진 않을 것이다. 다만, 적절한 때가 되면 나방이 촛불에 모여들 듯 확신 없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그에게 이끌릴 거라고, 그리하여 궁극적인 만족은 오직 정신적인 삶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함께 나눌 거라고, 그리고 스스로 사심없이 자제하며 자기완성을 추구하려 노력하다 보면 저술 활동이나 대중 연설 못지 않게 사회에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p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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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은 사교계에서 명성을, 이사벨은 막대한 재산을 확보하여 활동적이고 교양 있는 지역사회에서 확실한 지위를 얻었으며, 그레이는 안정적이고 수익성 높은 직업과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하여 6시에 나설 수 있는 사무실을 얻었다. 수잔 루비에는 안정을, 소피는 죽음을, 래리는 행복을 얻었다. 물론'자칭' 지식인들은 거드름을 피우며 트집을 잡겠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대중은 모두 성공담을 좋아한다. 그러니 나의 결말도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고는 할 수 없다. (p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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