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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Nov 03. 2023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영화 <연인> 1992년

영화 <연인>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장 쥐스노(Jean-Jacques Annaud) 감독의 작품이다.    

 

그 리무진 안에서 퍽 우아한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백인이 아니다. 유럽 스타일 옷을 입었는데, 사이공의 금융가들이 즐겨 입는 밝은 색 명주로 된 양복이다.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이미 사람들이 나를 보는데 익숙해 있었다. 식민지의 백인 여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다. 열두 살짜리 백인 소녀도 마찬가지다. 3년 전부터는 백인 남자들도 길에서 나를 봤다. 어머니의 남자 친구들은 내게 아내가 스포츠 클럽에 테니스를 치러 가는 시간에 차를 마시러 오지 않겠느냐고 상냥하게 물어보곤 했다. 

정말이지 사람들이 너무나 나를 보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여자들처럼, 아름다운 다른 여자들처럼 예쁘다고 착각할 뻔했고 그렇게 믿을 뻔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고 다른 것, 그렇다. 다른 어떤 것, 이를테면, 기질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나타내고 싶은 대로 나를 나타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내가 아름답기를 원하면 아름다워질 수 있었다.           (P25-26)     

펠트 모자를 쓴 소녀가 강물의 레몬 빛을 온몸으로 받은 채,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나룻배의 갑판 위에 홀로 서 있다. 남성용 모자가 그 장면을 온통 장밋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그것이 유일한 색깔이다. 안개가 뿌옇게 서린 강 위의 태양, 그 태양의 열기 속에 강기슭은 지워져 보이지 않는다. 강은 수평선과 맞닿아 버린 것처럼 보인다. 강은 유유히 흐른다. 어떤 소리도 내지 않는다. 몸속에서 흐르는 피처럼. 수면에는 바람 기운조차 없다.    (P29~30)     

나는 항상 얼마나 슬펐던가. 내가 아주 꼬마였을 때 찍은 사진에서도 나는 그런 슬픔을 알아볼 수 있다. 오늘의 이 슬픔도 내가 항상 지니고 있던 것과 같은 것임을 느꼈기 때문에, 너무 나도 나와 닮아 있기 때문에 나는 슬픔이 바로 내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나는 그에게 말한다. 이 슬픔이 내 연인이라고, 어머니가 사막과도 같은 그녀의 삶 속에서 울부짖을 때부터 그녀가 항상 나에게 예고해 준 그 불행 속에 떨어지고 마는 내 연인이라고. 나는 그에게 말한다. “난 어머니가 얘기하는 것을 확실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방이 바로 내가 기다리던 것이라는 것을 알아요.”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한다. 어머니는 마치 신의 사자(使者)나 되는 것처럼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악을 쓰며 말한다고, 어머니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그 어떤 신에게도, 그 어떤 것에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고함을 친다는 걸 그에게 말해 준다. 그는 말하고 있는 동안 내 입을 바라본다.          (P57)     

내게는 전쟁도 어린 시절과 똑같은 색깔로 기억된다. 전쟁 기간은 큰오빠가 군림하던 시기와 혼동된다. 그건 아마도 작은오빠가 전쟁 중에 죽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이미 말했듯이 작은오빠는 심장이 멈췄고 그렇게 잊혀 갔다. 전쟁 동안에는 큰오빠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같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이미 내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내게 전쟁은 큰오빠와도 같다. 전쟁은 큰오빠처럼 도처에 번지고, 침입하고, 훔치고, 또 감금한다. 또한 모든 것에 섞여 들어 머릿속에도 몸속에도 생각 속에도 존재하며, 깨어 있을 때나 자고 있을 때나 시종일관 제어할 수 없는 취기 같은 욕망에 사로잡혀 사랑스러운 영토 같은 어린아이의 몸을, 나약한 자들이나 패배한 민족들의 육체를 점령한다. 악은 바로 거기에, 우리 피부에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P77)     

늙어서 머리가 하얗게 세었을 때도 어머니는 사진관에 갔다. 혼자서, 짙은 빨간색 원피스에, 그녀가 지닌 두 개의 패물 중 하나인 긴 목걸이를 걸고, 비취에 금테두리가 둘러진 조그만 브로치를 달고 혼자 사진을 찍었다. 사진으로 본 그녀는 머리도 잘 손질되어 있고 주름살 하나 없다. 마치 그림 같다. 원주민들도 사진관에 가곤 했는데, 그건 일생에 단 한 번.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의식했을 때였다. 그런 사진은 아주 컸다. 모두 똑같은 형태였다. 그 사진들은 금박을 한 액자 속에 넣어져 조상을 모신 제단 가까이에 걸리게 된다. 많이 보아 왔지만, 사진에 찍힌 사람들은 거의 모두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들의 닮은 모습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노인들의 얼굴이 모두 비슷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모든 사진을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수정하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수정을 심하게 했던지, 노인들의 얼굴에 그나마 남아 있던 특성들마저 희미해져 버린 것이다. 그 얼굴들은 죄다 똑같이, 부자연스럽게, 영원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들 본래의 얼굴이 지워지고 똑같이 젊게 변모된 얼굴이었다. 이렇듯 개성이라곤 없는 비슷비슷한 얼굴로, 그들은 가족 사이에 존재했었다는 기억으로 남게 된다. 이런 얼굴 사진이 그들의 개성과 실재성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서로 더 많이 닮으면 닮을수록, 같은 핏줄이라는 사실이 더 명백해진다고 여기는가 보았다. 게다가 남자들은 모두 똑같은 모자를 쓰고, 여자들은 똑같이 머리를 올려 반듯하게 빗어 넘겼으며,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깃을 세운 윗도리를 입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 또한 똑같아 보인다. 지금도 나는 사람들 틈에서 이런 태도를 분간해 낼 수 있을 것 같다. 붉은 원피스 차림의 사진에 나타난 어머니의 모습은 바로 그 원주민들과 다름없어 보인다. 어떤 이는 고상하다고 말할 것이고, 또 다른 이들은 특징이 없거나 겸손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P114-115)    

       

그는 그녀를 바라본다. 눈을 감아도 그녀가 보인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다. 그는 어린 소녀의 향기를 들이마신다. 두 눈을 감고 그녀의 숨, 그녀가 내쉬는 따뜻한 숨결을 들이마신다. 그녀의 육체는 점점 경계가 희미해지고, 그는 이제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이 육체는, 다른 몸들과 달리, 무한하다. 침실 안에서 그녀의 육체는 점점 확대된다. 정해진 형태도 없다. 육체는 매 순간 생성되어, 그가 보고 있는 곳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존재한다. 시야 너머로 퍼져 나가 유희와 죽음을 향해 확장된다. 이 육체는 유연하여, 마치 성숙한 여자의 육체처럼 완전한 쾌락에 빠진다. 그녀의 육체에는 속임수가 없다. 놀라운 감각을 가진 육체이다.           (P117-118)     

사람들에게 그런 사실들을 알려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불멸성은 유한한 것이고, 불멸성도 죽을 수 있으며, 그리고 그런 사건이 일어났고,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불멸성은, 결코, 불멸성으로서 눈에 띄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절대적인 이원성이다. 그것은 세부적인 것에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근원 속에서만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은 불멸성의 존재를 품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하는 줄을 모르고 있다는 조건에서이다. 마찬가지로,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내면에서 그 불멸성의 존재를 간파해 낼 수 있는데, 그것도 똑같은 조건에서, 즉 그들이 그럴 능력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서이다. 이런 불멸성이 살아 있을 때에만, 삶은 불멸의 것이 된다. 불멸성이 삶 속에 있을 때, 그것은 길게 사느냐 짧게 사느냐 하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 다른 그 무엇인 것이다. 불멸성은 시작도 끝도 없다고 말하는 것도, 불멸성은 정신의 삶과 함께 시작되어 그것과 함께 끝난다고 말하는 것도 똑같이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불멸성은 정신에도 관여하고 또 바람을 쫓아가는 것에도 관여하기 때문이다. 사막의 죽은 모래들,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보라. 불멸성은 거기로 지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거기에 머물렀다가 우회한다.           (P124-125)     


소녀는 일어섰다. 마치 이번에는 자기가 달려가 자살하려는 것처럼, 바다에 몸을 던지려는 것처럼. 그리고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콜랑의 그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불현듯 예전에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제 그는 모래 속에 스며든 물처럼 이야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이제야, 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퍼지는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다시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P133~134)  

   

전쟁이 끝나고 몇 해가 흘렀다. 몇 번의 결혼과 몇 번의 이혼에서 아이들을 낳고 몇 권의 책을 펴냈을 즈음이었다. 그가 부인과 함께 파리에 왔다.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요. 그녀는 목소리에서 이미 그인 줄 알았다. 그는 말했다. “그냥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었소.” 그녀가 말했다. “나예요. 안녕하세요.” 그는 겁을 먹고 있었다. 예전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리는 음성 속에서, 갑자기, 그녀는 잊고 있던 중국 억양을 기억해 냈다. 그는 그녀가 책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이공에서 다시 만난 어머니를 통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오빠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생각하며 슬퍼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했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이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 

                                                                 파리 노플르샤토에서

                                                                     1984년 2월~5월

       (P136-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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