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5회로 연재됩니다】
아파트와 상가가 어수선하게 섞인 양주시내를 벗어나자마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야트막한 산줄기가 설렁설렁한 겨울 분위기를 자아냈다. 장욱진 미술관 진입로 앞에 새파란 글씨체의 현수막이 매서운 골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한쪽 귀퉁이가 찢어진 채 펄럭였다. ‘미술관 정비로 1월 휴관합니다’ 미술관 입구에서 직진해 뱀꼬리 같은 비포장 길을 1킬로 미터 더 들어갔다.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가스라이팅에 놀아난 것 같아요.
우주비행사 옷을 입은 분홍색 곱슬머리 스누피가 그려진 머그컵에 커피를 내온 최윤정이 작업실 창문 밖 울퉁불퉁한 악어 등짝 같은 기다란 산등성이에 눈길을 던졌다. 엊그제 내린 눈이 설탕가루 흘린 듯 듬성듬성 햇빛에 반짝이며 인적이 뜸한 산골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서초동 작업실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던 최윤정은 2년 전 양주 골짜기로 이삿짐을 옮겼다.
영등포에서 큰돈을 만지는 주류도매상이던 최윤정 아버지는 뒷배를 봐주는 조직을 비롯해 구청장과 경찰서장 등 양복을 입고 어깨에 힘준 인물들에게 정기적인 세비를 받쳤다고 언론에 폭로했다. 살해 협박에 시달리다가 일어난 일이다. 폭로 초기만 해도 최 사장이 언급한 인물들을 비난하던 여론은 경찰 수사가 진행되자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됐다. 언론은 경쟁하듯 최 사장의 불법경영과 탈세를 연일 다뤘다. 장부가 조작된 건지 어떻게 아냐, 왜 영수증 없는 거래를 했느냐, 정규직이 없는 회사라는 게 말이 되냐, 국가 존속에 위험한 쓰레기이므로 사법부는 신속하게 구속해 무기징역 콩밥을 먹이든가 광화문에 효수해야 한다고 원색적인 악플이 인터넷 뉴스 하단에 썩은 사체를 뜯어먹는 구더기처럼 우글거렸다. 부장은 진실 따위는 아랑곳없는 부화뇌동을 말하고, 언론은 교란과 이간질을 반복한다고 나는 말했다. 국장은 제복 입은 애들하고 금배지 단 애들 장난이 도가 넘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하고 노는 일도 심드렁한 날에는 오빠 방에 가서 이책저책 꺼내서 들췄다. 여덟 살 때 한문을 떼서 화엄경을 풀이했고 열 살 때는 사촌 오빠의 고등학교 영어책을 줄줄 읽는 바람에 집안의 신동이 된 오빠 책꽂이에는 재미있는 책이 없었다. 아버지가 읽던 책은 더 재미없어서 그림 한 장 없고 한문과 한글이 외계어처럼 뒤죽박죽 섞여서 책만 펼쳤다 하면 동생은 짜증부터 냈다. 동생과 번갈아 하도 달달 읽는 바람에 커버 모서리에 하얀 종이각질이 나풀대는 계몽사 소년소녀세계명작동화를 시시껄렁하게 읽다가 나란히 안방 아랫목에서 장미 담요를 덮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이다. 공작의 긴 꼬리깃털 일곱 개가 하얀 광목천에 멋들어지게 펼쳐진 해태보에 보라색과 주황색을 섞은 듯한 노을이 눈부시게 물들었다. 세로로 두어 군데 주름 진 해태보를 살짝 흔들면 도도한 공작이 춤을 추며 방바닥으로 설핏 뛰어내릴 것 같아 동생과 마주보며 까르르 웃었다.
엄마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듯한 부엌에서 살얼음이 서걱서걱 낀 동치미 무를 도마에 썰고, 갈치 몇 토막이나 조기 몇 마리를 굽는 석쇠를 연탄불 위에 올려놓고 무료한 저녁을 달래느라 수수께끼를 냈다. 시집갈 때 옷 벗고 갔다가 친정에 올 때는 옷 입고 오는 건? 섣달 그믐밤에 귀신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문 앞에 걸어두는 것은? 아침에는 네발이었다가 점심에는 두발이고 저녁에는 세발이 되는 건? 머리통이 조금씩 굵어져서 내가 마리 퀴리를 읽고, 마크 트웨인을 읽고, 마플과 포와로 경감을 읽는 동안에도 엄마는 구석기시대에서 튀어나온 사람처럼 전래 수수께끼를 계속 냈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수수께끼 가운데 꽤 긴 시간 답을 고민한 문제가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호랑이! 귀신! 방사선! 뱀! 폭탄! 김일성!
엄마가 가르쳐준 정답은 겨우 열 살이 넘은 아이에게는 너무나 뜻밖이어서 이해하는 데 그 후 오래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