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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캣브로 Mar 20. 2021

고양이 화장실 - 안전의 욕구

고양이 똥간

4냥꾼 캣브로, 여덟 번째 이야기




영화 속 주인공들은 항상 화장실로 도피하지


부푼 꿈을 안고 입사한 회사, 별것 아닌 실수에 상사에게 깨지고 만 청춘 드라마 속 우리의 주인공.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 울음을 터뜨리거나 씩씩거리며 분을 삭인다. 스마트폰으로 연인이나 친구에게 넋두리를 좀 하고 나니 기분이 나아진다.


이번엔 공포 영화다. 싸한 느낌과 함께 한기가 느껴진다. 멀리서 사람인지 무엇인지 모를 형체가 보인다. 공포감에 나도 모르게 도망친 곳은 바로 화장실이다. 막다른 곳에 결국 자기 자신을 가두는 꼴이 되는데도 이상하리만치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화장실에 숨는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그리고 정적. 안심하기가 무섭게 이내 요란하게 덜컹거리는 화장실 문. 다음 장면은 말할 것도 없다. 주인공이라면 살 것이고, 조연이라면 죽을 것이다.


첩보 영화도 다르지 않다. 부상을 입은 주인공이 당도한 곳은 화장실이다. 적국의 스파이는 품에서 소음기를 꺼내 손에 들고 있는 권총에 끼리릭 소리를 내며 부착한다. 첫 번째 칸에서 기척이 들려 문을 발로 부숴 보면, 애꿎은 사람이 손에 신문을 들고 벙찐 표정으로 스파이를 쳐다보고 있다. 그와 동시에 옆 칸에서 빠져나와 날렵하게 기습하는 우리의 주인공. 위기 상황에서 화장실로 도피하는 건 장르 불문 단골 클리셰이다. 그곳이 실제로 안전한지는 모르겠으나 안정감은 주는 것 같다. 이만큼 사적이고 은밀한 장소도 없기 때문일까.


은밀함 따위는 없이 부적절해 보이는 현장을 급습할 수 있었다.


고양이에게도 그렇다. 고양이의 조상은 사막에서 살았다. 배설물을 모래로 덮어 천적으로부터 자신의 흔적을 감추려는 습성은 지금도 고양이의 본능으로 남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깨끗하고 조용한 곳에 위치해 있기만 하다면, 어떤 집고양이는 화장실을 안전한 곳으로 여기기도 한다. 진공청소기를 무서워하는 우리 구로는 청소기 꺼내는 소리만 들려도 화장실에 숨는다. 2단계 안전 욕구와 관련한 용품으로 화장실을 선택해도 좋을 것 같다.


채움보다 중요한 비움


개만큼은 아니지만 고양이도 후각이 발달했다. 사람의 6배 정도이고, 시각보다도 후각을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이런 고양이에게 화장실만큼 다른 냥이들의 개성이 지독하게 발산되는 곳도 없을 것이다. 사이가 안 좋은 고양이도 있기에 보통은 고양이 마릿수보다 하나 더 많은 개수의 화장실을 쓰는 것을 권장한다. 역지사지다. 한적한 공중화장실과 인산인해의 화장실은 냄새부터가 다르다.


종의 차이를 극복하고 조금만 더 공감의 폭을 넓혀 보자. 화장실을 들어갔는데 첫 번째 칸에선 내 친구인 지용이의 변 냄새가 나고, 다음 칸에선 인규의 변 냄새가 난다. 변 냄새가 가득한 것도 찝찝한데, 알고 싶지도 않은 변의 주인까지 자동으로 연상되니 더 불쾌하다. 고양이들도 화장실을 쾌적하게 사용할 권리가 있다. 치우는 의무는 당연히 집사의 몫이다. 마릿수가 많다면 청소에 더 각별히 신경 쓰는 것이 좋다.


공간도 시간도 여백 없이 꽉 차 있으면 탈이 난다. 똥간도 마찬가지다. 한번은 아내와 난 서로 화장실을 치운 줄 알고 사흘 정도 그대로 두었던 적이 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똥지옥을 미리 체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붓다는 공(空)사상을 설파했던 것일까. 비유가 그다지 적절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무한지애의 자비를 바란다.


뚱뚱한 구로는 실수로 똥을 밟고 나올 때가 있다. 다행히 바닥을 누런 장판에서 흰색 타일로 바꾼 후 자국을 찾기가 더 쉬워졌다. 아니다. 오히려 눈에 띄지 않는 게 더 나았을지도.


마음대로 쌀 권리


우리 집은 화장실 세 개를 쓰고 있다. 뭔가 이상하다. 냥이들은 네 마리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한집에 사는 냥이들이 많아지면, 어느 순간 화장실을 무한정 늘려 주는 것이 어렵다. 최소한 각자의 화장실은 보장해 주기 위해 많이도 놓아 봤지만, 고정적으로 쓰지 않는 화장실도 생겼다. 집이 그렇게 크지 않 세 개가 적당했다. 다행히 냥이들끼리 사이가 좋아 같은 칸을 사용하는 것도 그렇게 꺼리는 것 같지는 않다. 고양이 복지를 위하여 환기가 잘 되는 베란다로 옮긴 것도 좋은 한 수였다.


화장실을 거실에 둔 적이 있었다. 겨울에는 환기가 어려웠다. 비움의 중요함을 역설한 것이 무색하게 물건이 가득하다. 변명하자면 구조를 바꾸면서 정리를 위해 잠시 올려두었을 뿐이다.


화장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스프레이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스프레이란 영역 표시나 구애를 위해 배뇨로 자신의 체취를 여기저기 묻히는 것을 말한다. 원래 스프레이 행동을 하지 않는 냥이가 갑자기 이 행동을 한다면, 그때는 불안·불만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의심해야 한다. 큰 소음이나 낯선 고양이의 등장, 환경의 변화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다묘 가정의 경우, 화장실이 너무 적거나 작은 것도 그런 행동을 유발한다. 특히 고양이가 새로 입양을 오게 되었는데 화장실을 따로 마련해 주지 않을 경우, 자신의 영역을 주장하기 위해 스프레이를 하는 경우가 많다. 화장실의 위치도 중요하다. 사료를 놓는 장소나 잠을 자는 곳과 너무 가까운 것은 좋지 않다. 사람과 비슷하다.


취향을 고려하여 두 층은 폐쇄형으로 한 층은 개방형으로 사용 중이다. 실은 3층까지 사기엔 너무 비싸 옥상을 올렸다. 내부 공간이 넓기에 대형 화장실을 둘 수 있어 불편함은 없다.


화장실에선 나의 냄새가 난다. 그곳은 익숙한 (친형제는 아니지만) 형제 냥이들의 냄새도 난다. 사방이 막혀 있어 공격에서도 안전하다. 나의 자취를 감추기 위해 생활권에서 가장 멀어져야 하는 곳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안정을 주는 곳이다. 밟으면 폭신폭신한 모래도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을까 싶다. 이런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냥 집사가 한 번 더 고생하면 된다. 글은 이만 줄이고, 고양이 똥이나 한 삽 푸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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