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꼭 가을이 가기 전에 써야 할 것 같다. 계절은 벌써 한 해의 끝자락. 달력이 홀쭉해졌다. 언제부턴가 가을이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루시아 아줌마
어머니와 함께 성당 모임을 하던 분이다. 아줌마는 유방암으로 오랜 시간 투병 중이셨는데, 늘 밝고 외부 활동에도 열심히라며 어머니께서 이야기해 주셨다. 내가 같은 병으로 투병하면서부터 성당 모임에서 늘 ‘김 루시아와 윤 아녜스의 영육(靈肉)간 건강’이라는 기도가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지만 끈끈한 동질감에 마음속으로 쾌유를 바라던 분이었다.
회사 생활을 하다가 다시 치료를 받게 되었을 때에도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이 루시아 아주머니였다. 이 일로 주변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었는데, 아줌마라면 무슨 이야기든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께 전화번호를 받아서 연락을 드리고, 그분의 집 근처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아주머니는 병세가 다소 진행되어 걷기가 불편해진 모습이었다. 건강에 좋다는 청국장에 보리밥을 먹고, 햇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 앉아 차를 마셨다. 많이 야위고 수척해진 아줌마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암 환자의 경우 오랜 기간 항암제를 사용하면 탈모, 손발톱이나 피부가 검게 변하거나 빠지곤 하는데 너무 해맑게 그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씩씩함에 마음이 아팠다.
평화로운 공기 속에 시간이 흘러갔고 대화도 무르익었다.
‘휘리릭-’
부는 바람에 은행잎이 한꺼번에 흩날렸다. 샛노란 단풍들이 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사선으로 쏟아져 길가로 내려왔다. 창밖을 바라보던 아줌마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낙엽이 너무 예쁘다. 바람에 이렇게 흩날리니까 더 아름답네...
아녜스, 나 주치의가 이번 가을이 마지막 가을이 될 거라고 마음의 준비하라고 하더라. 근데 난 못 죽어.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어떻게 죽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본인도 힘들 텐데 오히려 나에게 힘내라고 잘 될 거라고 응원의 말들을 잔뜩 해주셨다. 헤어지면서 물었다.
“아줌마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댁으로 가시는 거예요?”
“아니. 애들이랑 영화 보러 가려고. <인터스텔라>.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꼭 한번 보고 싶어서.”
엷은 미소를 남기고 아주머니는 돌아섰다.
이듬해 한 번의 가을을 더 보내고, 아주머니는 하늘로 가셨다.
그 후 매년 찬 바람에 은행잎이 떨어지는 풍경을 볼 때면 어김없이 루시아 아줌마 생각이 난다.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서 떠나지 못하겠다는 아주머니의 말이 단풍잎 흩날리듯 귓가를 맴돈다.
찬란해서 슬픈 가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