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외쿡인 노동자의 노마딩 이야기
비록 샌프란 왕복에 환승 네번, 비행기 여섯번을 타야하는 일정을 잡게 되었지만 뭔가 HR 이 정식으로 태클(?)을 걸었고, 이로 인해서 더 이상 조용조용히 원격하지 않게 된 것 같은 느낌.
매니저 그리고 매니저^2 가 공식적으로 리모트로 인정하고 알리기로 결심을 했는지, 이번에는 비행기표에 이어서 호텔까지 회사 지원이 나옴. 베이 지역의 어마어마한 집값 때문에 갈 때마다 엄청 알아보고 shared bath 에 방 한칸만 빌려도 하루에 $100 이 넘는 가격이었는데 이번에는 별 고민없이 회사 사이트 통해서 하룻밤에 $250 짜리 호텔에서 3박하기로. (그러다보니 왕복 티켓도 아닌 편도 티켓에, 3박 머무는 나 하나에 들어가는 비용이 $1200 을 넘는다 덜덜덜)
매니저^2 가 senior director 인데, 그분의 예산에서 집행하는 부분이고 앞으로도 분기별 한번 정도씩은 이렇게 부를테니 출장으로 오라는 전언이 있었음. 뭐, 나야 좋지. 안 그래도 적당한 스킨쉽의 유지를 위해 이래저래 3-4개월 한번씩은 본사에 꼬박 오고 있었는데, 비용을 회사에서 대준다고 하니. 분위기상 완전히 출장으로 잡아서 식비 등의 체류비도 지원해 줄 기세.
매니저와 대화를 통해서 매니저, 그리고 매니저^2 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되었는데, 다행히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입장을 그대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리모트를 그만둬야 하는 순간이 오면 회사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어쩌다보니 야금야금, 아주 서서히 팀에서부터 떨어져나와서 리모트가 된지 1년하고도 3개월이 넘어서, 내가 회사에 출퇴근하던 시간보다 원격한 시간이 2배가 되었다. 그동안 주변팀의 시선을 의식해서 조용조용히 원격을 하기로 매니저, 매니저^2 와 협의를 하고 시작했었는데, 이제는 덜 그래도 되는 분위기로 가는듯. 사실, 이제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알기도 하고.
expectation management 를 얼떨결에 성공한 케이스가 된 것 같다.
(1년 4개월전, 2016년 2월 - 매니저와 1:1 미팅)
나: 동부로 이사가. (사실은 퇴사를 결심하고 한 이야기였다.)
매니저: What can I do for you? (내가 타이밍을 잡고 이야기한건 아니었는데, 우리 팀에서 한번에 2명이 퇴사했던 시기라 나까지 퇴사하면 팀이 해체될 타이밍이긴 했다.)
나: (응? 사실 가장 좋은 케이스로 예상하고 있던 대답.) 동부로 이사가는데 원격지원이 되면 계속 같이 일하고 싶어. 나 우리 팀에서 일하는거 좋아. (설마 이게 되려나? 이 시기에 원격하던 사람들 내보내던 시기였음)
매니저: 아예 가는거야? 아니면 돌아올 수도 있어?
나: 아직은 잘 몰라. I may or may not come back. 3개월에서 6개월쯤 살아보고 정할 것 같아.
매니저: 알았어. 매니저^2 랑 HR 이랑 상의해보고 알려줄께. Give me some time.
(1주일 뒤 - 매니저와 1:1 미팅)
매니저: 매니저^2, HR 이랑 얘기해서 일단 임시로 원격을 지원하기로 했어. 일단 '임시'니까, 팀원들에게 그렇게 이야기 해놓을꺼야.
나: (오?) 그래? 잘됐다. 그럼 대신 내가 서부시간 맞춰서 일할께.
매니저: 그러자. 언제 떠나야해?
나: 2주 뒤에 떠나.
매니저: 딱히 준비해야 할 것은 없을 것 같고 다만, 회사가 원격근무를 discourage 하고 있고, 다른 직원들의 사기가 있으니 조용히 하는 걸로 하자. 굳이 숨길 필요는 없지만 굳이 이야기는 하지 않고, 이야기하게 되면 '임시로' 하는 것이라고 말을 맞추자. (사실 이렇게 디테일하게 이야기 안 했으나 이렇게 알아들을 뉘앙스였음)
나: 오케이 알았어. 우리 팀원들은 아는거지?
매니저: 응 내가 얘기해놓을께. 그래도 너도 한명씩 만나서 미리 얘기해놓으면 더 좋을 것 같아.
나: 오케이. 그렇게 할께.
(2주일 뒤, 마지막 출근일)
(그동안 팀원들이랑 개인적으로 1:1 시간 만들어서 다 얘기해놓음. 매니저^2 랑도 별도의 1:1 했음)
나: (조용하게 팀원들한테만) 나 퇴근해. 온라인에서 만나. :)
팀원들: (다들 한번씩 포옹해주고 손 흔들어 줌.)
(원격근무 첫 몇주)
매니저: 뉴욕은 어때? 특별히 불편하거나 그런거 없고?
나: 응, 나는 괜찮은데, 언제든 너도 팀원들도 내가 원격으로 있어서 불편한 부분이 생기면 이야기해줘. 내가 메꿀 수 있는 부분은 메꿀께.
(원격근무 후 3개월 뒤, 첫 오피스 출근)
팀원들: (다들 한번씩 포옹하고 엄청 반갑게 맞아줌) 오 반갑반갑. 웰컴백. 있는 동안 팀런치랑 팀빌딩 이벤트 ㄱㄱ
나: 나도 엄청 반갑반갑. 팀런치 & 팀빌딩 콜. ㄱㄱㄱ
- 실제로 팀빌딩 이벤트에 맞춰서 간 것도 있었음.
(매니저와 1:1 미팅)
매니저: 뉴욕 생활은 어때? 원격은 할만해?
나: (이때까지만 해도 노마딩 할 생각 못 했음. 뉴욕에서 잘 살고 있었음) 응 생각했던것보다 좋네. 도시도 새롭고 잘 적응해나가고 있어. 내 원격에 대한 피드백은 어때?
매니저: 다들 너 여기 있을 때처럼 일 잘한다고 좋은 피드백들이야 전부. (감동 ㅠㅠ, 그리고 이 무렵에 같이 일하던 형이 사적인 자리에서 내 팀원에게서 나에 대한 좋은 피드백을 받아서 전해줬음 ㅠㅠ)
나: 오 다행이다. 계속 열심히 하겠음.
(매니저^2와 1:1)
매니저^2: 뉴욕 생활 어때? 원격은?
나: 뉴욕 생활 잘 맞고 좋은거 같아. 원격도 생각보다 할만해. 매니저 이야기로는 원격에 대한 피드백이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진짜 다들 괜찮은건지는 아직 모르겠어서 열심히 계속 해볼께.
매니저^2: I heard it's working out so let's keep it going. All feedback for you was that you are a great engineer. (문명에서 나오는 위대한 기술자가 떠오르면서 순간 개뿌듯해서 표정 관리 못함. 회사가 다운턴이라 엔지니어들이 자꾸 떠나가고, 새로 뽑기는 어려운 회사에 있어서 장점 중에 하나는 이렇게 엔지니어를 잡으려고 칭찬을 많이 해줌... ㅋㅋㅋ)
나: 와 정말 듣기 좋은 소리네. 고마워. 계속 열심히 할께. (그 이후는 캐쥬얼 한 1:1 과 회사 앞으로 나갈 방향, 나한테 기대하는 바, 내가 어떻게 하면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을지 등등 이야기함)
(원격근무 후 약 6개월 뒤, 두번째 오피스 방문)
(이때는 뉴욕도 떠나서 노마딩 중이었고, 레이오프가 생긴 직후였나 그랬음.)
팀원들: (이제 약간 다들 적응됨, 사실 내가 원격하다 뉴욕으로 이직 할거라 생각하지 않았었나라는 생각도 했음. 근데 내가 안 하고 잘 다님. ㅋㅋㅋ) 오 왔어? 웰컴백. 팀런치 ㄱㄱㄱ
- 이때는 처음보는 팀원도 있었고, 나간 팀원도 있었고, 내 얼굴을 화상으로만 보고 만난적이 없는 옆 팀 사람들도 있었다. 뭔가 진짜 나 원격이구나 싶은 시점.
나: 그러게 또 보니까 반갑고 좋네 역시. 있는 동안 팀런치 ㄱㄱ
- 벌써 6개월 때부터 꽤 캐쥬얼해졌다. 옆팀에 그나마 친하던 동료가 뒤늦게 내가 이렇게 원격하는 것을 알게 되서 둘이 따로 얘기하게 되었을 때 나눴던 대화.
C: 와 대단하다. How did you manage to make this happen? 나도 하고 싶은데 회사에서 잘 안 해주잖아.
나: 허허허. 그러게 하다보니까 그렇게 됐네.
C: 그럼 집에서 일하겠네? 그럼 굳이 뉴욕에서 일 안해도 되는거잖아? 여행다니면서 일하는 것도 가능하고, 집 값 싼데 있으면 저축도 많이 할 수 있겠다!
나: (뜨끔...) 헣헣헣. 이론상으로 그렇기는 해 ㅎㅎ (미소미소)
C: 멋지다 진짜. You are my inspiration, buddy.
나: (내가 영어쓰는 사람한테 inspiration 은 받기만 했지, 줘본 적이 없어서 이게 참 또 오래 감동이었음. 말도 참 착하게 하지 ㅠㅠ)
(3개월 전, 원격 이후 세번째 사무실 출근)
(이때도 다시 한번 레이오프가 있었고, 그래서 내 이전 팀이 사라지고 나도 팀이 바뀜)
새로운 팀으로 가니, 내가 '임시'로 원격이라고는 하지만 다들 나를 '원래 원격인 사람' 으로 인식하기 시작. '임시'로 원격을 시작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명 안 남음;;
새 팀원: Welcome to the team. 그리고 이렇게 빨리 와줘서 고마워. (사실 새 팀원들이랑 스킵쉽 할 겸 조금 부랴부랴 빨리 방문한 것도 있었다.) 같이 잘 해보자.
나: okies, let's do this. (그리고 내가 두번째 시니어라 빨리 적응하고 빨리 일을 해야하는 상황이었음.)
새 팀원들도 알아서 내가 원격인 것에 본인이 적응하는 분위기.
- 그리고 이제 각각 다른 팀에 있는 옛 팀원들을 모아서 넷이서 점심을 먹는데
옛 팀원 J, 현재 다른 팀: 준, 너는 돌아올 생각이 없는거야?
나: 이제는 돌아오기 어려워진 것 같네. 원격도 나랑 잘 맞는 것 같고, (사실 이 친구는 team lead 로 승진을 했고, 나를 데려오고 싶어하는 것 같았음. 그래서 현실적으로 얘기를...) 지금 내가 받는 수준의 연봉으로 이리로 못 돌아올 것 같아. (데려오고 싶으면 오퍼를 높여서 불러주세요 ㅋㅋㅋ)
J: 아, 한번 떠나면 오기가 어려워지는구나. 아쉽다, 돌아와서 같이 일했으면 좋겠는데. 그건 그렇고, 와 어떻게 이렇게까지 manage를 한거야? 너 임시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아예 원격이 된 것 같아.
나: 그러게. 나도 이렇게까지 될줄은 몰랐는데 잘 흘러왔네. (조금은 친하니 조금은 솔직하게) now it's good for me that nobody is expecting me to come back hehe
J: 진짜 신기하게 됐다. 회사에서 너처럼 하려고 이렇게 저렇게 했던 사람들이 여러명 있었는데 결국 다들 잘 안 됐는데, 너는 어떻게 한거야? under the table 로 뭐가 있는거 아냐? (반농담 반진담각 ㅋㅋ)
나: under the table 로 뭐가 있는건 아니고 ㅋㅋㅋ 내 몸 값이 싸서 그럴지도? ㅋㅋㅋ (반농담 반진담 ㅋㅋㅋ 어차피 서로 연봉 모름) 그러게 진짜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이게 이렇게 자리 잡을 줄 몰랐네. 앞으로도 자주 올께 자주 보자.
J: Glad that it's working out for you. Hope you to come back though. 자주 와!
그리고 현재. 이전에는 매니저와 이야기를 나눌 때, 내가 원격에 있고, 그게 주목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매니저가 이런 저런 커버를 쳐줬었는데 이제는 그냥 있는 그대로 되지 싶음. 물론, 노마딩이 아니라 뉴욕에서 근무한다는 전제지만. (i mean, who cares anyways)
5주 뒤면 입사한지 만 2년이 꽉차고, 3년차가 시작된다. 연차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늘어나지 않는 내 실력에 비해 서류상으로 쌓여가는 연차가 스트레스를 주고 있지만 적어도 회사에서 2년 가까이 잘 살아남았다. 유학 온 뒤로 매해가 그래왔지만, 인생에 다시 하기 어려운 경험들 적당히 배째가면서, 아슬아슬하게 살아왔다.
재밌었고, 즐거웠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재밌고, 즐겁게 살수 있으면 좋겠다. :)
이래놓고 다다음주에 회사갔는데 HR 이 태클걸면, 원격불가 -> 그럼 나는 퇴ㅋ사ㅋ 이렇게 될지도 몰라요. 그전에 짤릴 수도 있고. 다이나믹 실리콘밸리 외노자 라이프. 당장 다음주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는 인생이 5년째입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