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과 삶의 뫼비우스적 관계

시론 / 이수광_경남교육청 미래교육원장

누구든지, 삶은 늘 숨 가쁘다. 삶터에서는 일상(日常)과 비상(非常)이 뒤섞인다. 서로 모순되는 지향이 부딪히고 가치들도 각축한다. 새된 구호도 난무한다. 정체가 뚜렷하지 않은 불안과 두려움도 짝을 이룬다. 그렇다 보니, 삶의 화사함도 삶의 덧남도 영원치 않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삶의 인류학적 풍경은 우왕좌왕, 좌충우돌, 후회막급이다. ‘좋은 삶’을 고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인가? 내 감각으로 말하자면, ‘경계가 확장된 자유로운 삶’이다. 삶의 경계, 즉 삶의 역대(域帶)를 확장하여 입체적인 감각을 발명하고, 고요와 박동 사이에서 인간적 질감을 완미(婉媚)해 가는 삶이다. 문제는 내 삶의 현재적 바탕과 ‘좋은 삶’ 사이에 간극이 크다는 점이다. 비겁함, 용렬함, 비루함, 초라함, 야비함, 황량함, 식상함, 그리고 이기심까지 삶의 갈피에 겹겹이 옹이져 있다. 삶의 미학(美學)은 고사하고 속물(俗物) 그대로다. 절망적인 상태다(괴테가 말하길,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노예만큼 절망적인 노예는 없다’ 하지 않던가!).


그렇다고 삶을 멈출 수 없는 노릇. 절망을 벗어나는 노력이 절실하다. 첩경은 없다. 단지 ‘배움’이 가장 빠른 길이다. 따라서 인간 존재성에 대해, 인간다움에 대해, 인간다움 실현을 위한 인류의 고투에 대해, 공존의 형식에 대해, 사회제도의 구성과 운영에 대해, 사색의 신비에 대해, 선한 마음을 갖는 것에 대해, 더 좋은 것을 선택하는 방법에 대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에 대해, 고독을 즐기는 것에 대해,.. 등등등을 더 배워야 한다. 이런 배움이야말로 삶의 윤리이자 방법이다.


학생들에게도 깊이 있는 배움이 절실하다. 당대 학습생태계에서 성장하고 있는 그들에게는 단순화된 상장 경로와 상투적인 삶의 문법이 주입됐을 개연성이 있다. 정보 체제(Information reigme)에 예속되어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마냥 자유롭다는 망상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경쟁교육 속에서 자기 생존에 집중하다 보니 ‘지성의 폐활량’이 좁아지고, 삶의 질감은 둔탁해졌을 수도 있다. 실상이 그렇다면 이는 교육적 재앙이다. 학생은 비록 어린 존재이긴 하지만, 각자는 성장단계에 따라 그에 걸맞은 인품과 품격, 그리고 인간적 매력을 추구하는 존재다. 문제는 학생들의 이런 내적 요구를 충족시켜 줄 교육적 자극과 자원의 질은 불량하다. 따라서 어른들 입장에서는 학생들의 ‘표면화되지 않은 내적 요구’를 감각하고, ‘실존적 윤기’를 채워 갈 수 있는 힘을 자극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니 어른들이 먼저 더 깊고 넓게 배우고, 그 배움의 세계로 학생들을 안내해야 한다. 배움의 차원이 달라지면 삶의 차원도 달라진다. 모든 이에게 이 배움의 법칙은 고루 적용된다.


철학자 김진영의 성찰이다.

“살아 있는 동안은 삶이다.
내게는 이 삶에 성실할 책무가 있다.
그걸 자주 잊는다.”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p.14)


삶의 성실함이란 무엇일까? 성실함의 요체는 아마도 ‘좋은 삶’을 위한 그 어떤 노력이 아닐까? 그리고 그 노력의 중심에는 앎의 추구가 있지 않을까? 제대로 배우지 않은 이에게 추상의 세계가 감각되기 만무하다. 배워야 마음의 눈도 열린다. 존재의 허망에 맞서는 힘 또한 앎을 통해 응축된다. 이런 점에서 삶은 앎의 외재화(exteriorization)다. 아는 만큼 산다. 그러니 앎을 위해 더 성실해야 한다. 불성실이 쌓이면 천격(賤格)이 되니 말이다.



2025 겨울호 목차

1. 시론
2. 포럼&이슈
3. 특집
4. 수업 나누기 정보 더하기
5. 티처뷰
6. 전국NET소식
7. 이 책 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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