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한 권! / 임병구_인천석남중 교장
그는 어떤 심경일까? 국가교육위원회 이배용 위원장이 2022 개정 교육과정 심의 본을 일방적으로 처리한 날 저녁, 그의 책을 다시 펼쳤다. 그가 30여 년 전, ‘국가교육과정위원회’일 때부터 고민해 온 합의제 국가교육 거버넌스 기구가 합의는커녕 독단이 횡행하는 정부 들러리로 전락했다. 새 정부 교육정책이 퇴행을 거듭하고 있는데 그가 공을 들였던 국가교육위원회는 무기력하다. 국민의 뜻을 모아 정파와 교육 기득권 구조를 뛰어넘는 중장기 교육 비전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고 있다. 그는 국가교육위원회 준비 조직인 ‘국가교육회의’를 맡아 1기 단장과 2, 3, 4기 의장으로 일했다. 교육 관계자들은 정권에 따라 요동하지 않을 국가교육위원회 초석을 놓으려던 그의 심모원려(深謀遠慮)를 기억한다. 그런데 국가교육위원회가 이 모양이라니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그는 목소리가 높지 않은데 대중들은 크고 깊게 들어왔다. 계간지 「민중교육」을 만들었고 그 영향력이 전국교사협의회를 거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일으켜 세웠다. 정책실장으로 일했고 10년 앞을 내다보는 합법화 투쟁 전략으로 교사들을 설득해 냈다. 전교조 노선을 고민하면서 참교육 실천 사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했고 스스로 참교육실천위원장을 맡았다. 교과 모임과 주제모임으로 조직해 전국에서 모인 초창기 참교육 실천대회는 서슬이 푸르던 시절 새로운 교육을 꿈꾸던 이들에게는 축제이자 해방구였다. 노동조합 권익 투쟁과 아이들과 함께 하는 참교육 실천을 양 날개로 삼자는 그의 주장은 확고했다. 비록 탄압을 받고 있더라도 교실과 학교에서 교육 변화를 일구는 게 전교조가 국민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신념이었다.
그는 전교조가 교착 상태에 빠져 혼란할 때 지역을 화두로 내놓았다. 술자리 말석에서 까마득한 후배로서 들어온 그의 고민거리는 늘 멀리 앞날에 가 있었다. 그는 고뇌를 멈출 수 없는 교육운동가였고 태생이 시인이라서 시대에 예민했다. 시를 썼고 어느 날은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장편소설을 출판해 내게도 툭 던졌다. 나중에는 동화작가가 되어 권위 높은 프랑스 문학상 앵코륍티블상을 받기도 했다. 한겨레신문 등에 교육칼럼을 실었고 교육평론가로 불리기도 했다. 학교와 교사들 노력만으로 바꿀 수 없는 교육은 지역과 만나야 활로를 열 수 있었다. 오늘날 ‘마을 교육’을 그는 이미 교육 운동 범주에 넣어 글로 강연으로 말하며 전국 곳곳을 누볐다. 그게 합법화 이전의 일들이니 그와 꽤 오래 만나온 셈이다.
최근에 그를 만나 소주잔을 기울였다. 빠르게 마셨고 여러 병 쓰러뜨렸다. 교육도 교육이지만 이 시대는 취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다던 시절로 급전직하 중이었다. 그는 여전히 고뇌를 거듭하면서 활로를 찾고 있었다. 그가 건네준 책, 『시대의 경계에서 일인칭으로 말 걸기』(해냄에듀, 2022)는 일단, 재밌게 술술 읽힌다. 일상 에피소드를 물꼬 삼아 일흔을 넘긴 사색 연륜을 뭉근하게 풀어낸다. 생각은 뜨겁지만, 말투가 잔잔해서 곁불 쬐듯 서서히 내 생각을 달군다. 논리를 앞세우지 않는 글인데 간간이 들어온 그의 얘기와 뒤섞이면서 내 속에 남아 논리를 쌓도록 돕는다. 그가 어머니께 들었던 여성들 19금 대화를 시작으로 풀어낸 우리 시대 담론은 페미니즘을 둘러싼 격렬한 대립의 경계를 가볍게 넘어선다. 정색하고 논쟁하지 않는데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끄덕여진다.
이 책은 1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과 2부, ‘진정한 뉴노멀을 위하여’로 나뉜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서 그는 비관론자를 자처한다. 그는 진영화 한 한쪽인 우리 편에 대해 슬프게 말한다.
“개혁을 말하는 사람 중 상당수는 모든 걸 하나로 동일화하고 획일화해 가는 ‘1’의 논리, 그 결과물인 차별, 학벌 등을 무지나 시스템의 오작동으로 인해 나타난 실수로 생각하고 이 부분적 실수를 바로잡으면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다 아는 것을 고압적 자세로 계몽하려 들고, 매우 초연한 위치에서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걸 어떻게 하나도 안 하냐고 분노하기도 한다. 그리고 개혁적 일을 맡으면 남의 핑계를 대며 쉽게 포기하거나, 다양성을 ‘1’의 논리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의 다양성으로 축소해 낡은 체제의 장식품으로 만들어 버린다.”(55~56쪽)
그는 노무현 정부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이었고 문재인 정부 국가교육회의 수장이었다. 큰 역할을 맡았기에 더 큰 비판과 직면했을 것이다. 현실을 단순화해 쉽게 현상을 재단하고 해법을 내오라는 주문이 쏟아졌을 것이다. 복잡하게 엉킨 실핏줄 같은 교육생태계에 선뜻 칼을 댈 수 없을 때, 그 칼날 방향은 진영 내부로 향한다. 그는 피를 흘릴지언정, “세상이 파국에 이르러 사람들이 돌아설 때 폐허 속에서 부러져 있는 희미한 이정표”(56쪽) 로 이 글들이 읽히기를 바라는 듯하다.
많이 회자 된 얘기도 등장한다. 그가 출장 간 틈에 집에 강도가 들었다. 값어치 나가는 물건을 찾지 못하자 뭐 하는 집구석인가 물었고 전교조 해직 교사 집이라는 얘기를 듣고 칼을 내리고 철수했다는 사연이 나온다(107쪽). 워낙 유명한 일화라서 알고는 있었지만, 이 얘기가 그가 겪은 일이라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감옥살이를 통해 스스로 엘리트 껍질을 벗은 이야기나 노무현 대통령과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던 장면도 흥미진진하다.
훅하고 치고 들어오는 글이 많지만, 이 꼭지는 백미다. ‘정미조의 「개여울」과 아이유의 「개여울」’. 김소월 시를 노래로 옮긴 정미조의 깊은 음색은 내게도 절창이었다. 아이유가 다시 부른 개여울을 들으면서 젊은 감각을 내세우거나 나이 차이를 운운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그는 그런 감상에서 몇 걸음 더 나가 문명비평가로서 시대를 진단한다.
“기성세대는 워낙 ‘1인칭으로 말하기’가 탄압받는 사회 속에서 3인칭의 더 문명화된 ‘〇〇처럼 되기’를 맹렬하게 살다 보니까 1인칭으로 말하는 걸 아예 잃어버린 것 같다. 그러니까 정미조의 「개여울」처럼 연애도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하려고 든다. 그런데 연애를 1인칭으로 하지 3인칭으로 하나? 1인칭의 아이유 노래가 훨씬 강한 울림으로 가슴 속의 에너지를 깨워 낸다.”(154쪽)
그는 여전히 젊고 아이들과 감각을 공유하는 지대에서 서성인다.
동양, 특히 우리에게 뽕밭은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에로틱한 성역(性域)이다. 그는 결혼 전 성적으로 자유로웠던 여성사부터 모계사회 연원을 훑으며 요즘 가족 제도가 어떻게 사회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지 그물망을 좁히듯 탐색한다. 원시인들 노동시간이 이야깃거리로 등장하고 인디언에게 총을 줘도 필요량만큼만 사냥하고 재산을 축적하지 않는 습성과 미친 듯이 일하는 우리를 비교한다. 노동 시장 문제와 기본 소득까지 화제에 오르다가 최종 결론은 역시나 교육 문제에 다다른다. “실업과 비정규직 노동, 정규직 노동으로 해체되어 더욱 소외가 깊어지는 후기산업사회의 직업 노동을 소외되지 않은 창조적 일로 전환할 수 있는가 여부는 미래 사회 성패의 시금석이다. 이러한 전환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교육의 대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204쪽)
그는 현재 한국 사회를 ‘해일 직전, 카지노가 있는 해안가 풍경’으로 묘사한다. 거대한 위기가 몰려오고 있지만, 일확천금에 눈먼 이들은 잭팟만 노리고 있다. 멸망의 징후 앞에서 그는 여전히 “내게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은 뭘까?” 묻는다. 그가 책에 자문하고 자답한 결과는 의외다. 나는 그를 경세가로 믿어왔기에 당나라 시인 이하의 시 ‘소소소의 무덤’에서 출발해 시경에 있는 시 ‘동문의 느릅나무’, 마르크스 시장 경제를 누비는 그의 생각을쫓기 바쁘다. 그가 결론으로 던져 준 ‘교육정책의 진경산수’는 어차피 나를 비롯한 후세들이 져야 할 빚이다. 진경을 그리기는커녕 화판을 뒤집거나 교육 진로를 먹물 진흙탕에 처넣는 시절, 그와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교육 얘기로 밤을 지새우고 싶다. 그도 답답하겠지만 우리 모두 막혀 있으므로 이 책을 벗 삼아 칠흑 암야를 건너가도 좋겠다.
들어가는글_2022 새넷 겨울
1. 시론
2. 이슈 & 포럼
3. 특집
4. 전국넷
5. 수업 나누기 & 정보 더하기
6. 티처뷰
7. 이 책 한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