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이 불러온 카펫 대참사
그날,
나는 꽤 괜찮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진실의 순간까지는 말이다.
우쭐하면 반드시 화가 따른다.
문제는, 사람은 우쭐할 때는, 본인이 우쭐한 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 부분을, '나' 로 바꾸면 된다... 그렇다. 다름아닌 내 얘기다)
마라케시 생활도 익숙해져서,
"나 이제 좀 마라케시 아는데?"
라고 스스로 착각하게 된 순간이 있었다.
악명 높은 마라케시 택시 기사들이 부르는 바가지 요금과도 맞설 수 있었고,
시장 상인들이
“니하오, 차이니즈? 재패니즈? ”라고 외치면
그냥 손 한번 휙 흔들고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조금씩 이 도시의 리듬에도 적응해 있었다.
미로 같은 Souk도, 지도를 보지 않고 대충 출구를 찾아 나올 수 있을 정도였으니...
"이 정도면, 뭐… 마라케시 마스터라고 해도 되지 않나? "
한껏 자신감에 차올라 있었건만...
그때의 나는 몰랐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실수가
‘모른다는 걸 모르는 상태’라는 걸.
마(魔)는 늘 방심한 순간에 찾아온다.
나는 원래 카펫에 약했다.
젊었을 땐 페르시아 Gabbeh에 반해
월급을 몽땅 털어 한 장을 샀던 적도 있다.
강렬한 붉은색,
짙은 파랑,
손맛 가득한 기하학 무늬…
나는 카펫 앞에서는
지갑이 먼저 스스로 열리는 인간이었다.
그러니 마라케시 Souk에서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게 Berber 카펫이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Gabbeh처럼 선명하면서도,
모로코 특유의 투박하고도 리듬감 있는 문양이 얹힌 패턴.
‘이건 들고 나가면 평생 자랑할 수 있겠다’ 싶었다.
며칠 시장을 돌아보니
예전에 Gabbeh에 지불했던 가격보다 훨씬—정말 훨씬—저렴한 듯했다.
그러자 묘한 자신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는 이제 마라케시 마스터고,
카펫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거든.”
…이런 착각이 바로 참사의 시작이었다.
“구경만 하고 가요~”의 비극
Souk을 어슬렁거리다
눈에 강하게 띄는 카펫 하나에 시선이 꽂혔다.
"구경만 하고 가요~"
그 흔한 말에,
아무 생각 없이 발을 들였다.
아저씨는 일단 향긋한 민트티부터 내왔다.
"안 사도 돼요, 안 사도 돼"
이 말도 지금 생각하면 ‘전형적인 사기 트랩 첫마디’였다.
차 한 잔, 두 잔 마시는 사이
처음엔 여행자 체크용 기본 질문들이 이어졌다.
“마라케시 처음이야?”
“어디 묵고 있어?”
“호텔 사람들 친절해?”
지금 돌아보면…
전부 ‘호갱 레벨 체크 + 호텔 직원들 경계용 파악’ 질문이었다.
슬슬 시작되는 ‘명연기
대화는 점점
전형적인 “감정몰이 스토리”로 바뀌었다.
“오늘 장사가 하나도 안 됐어…”
“이제 문 닫고 가보려고 했지…”
“애가 아픈데 약을 못 샀어…”
“애가 배고파서 집에 있어…”
그때 처음으로
“어… 이거 좀 이상한데?”
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생각을 밀어냈다.
이미 여러 잔 차까지 마신 채로,
경계심은 차와 함께 천천히 희석되고 있었고,
"나 마라케시 고수잖아?"라는 비뚤어진 자신감(?)이
나의 경고 시스템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카펫 상인이 능숙한 솜씨로 하나씩 펼쳐 보여주는
카펫의 아름다운 패턴에 마음이 빼앗겨
내 마음은 슬슬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본격 네고 지옥
"10,000 dirham(디르함)!!! 진짜 싸게 주는 거야."
집에 모셔 놓은 Gabbeh 가격을 생각하면 완전 싸 보였다.
하지만 당시 다행히(?) 내 지갑엔 현금이 거의 없었다.
“Hoya, 현금이 없어요… 다음에 올게요.”
(Hoya는 모로코에서 '형님' 또는 '아저씨' 정도의 의미)
그는 내가 흥정한다고 생각했는지
다급하게 가격을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진짜 애 때문에 현금이 필요해서 그래. 애가 아파서~
5,000 dirham! 너 좋은 사람이라 내가 이렇게까지 내려."
그러나 나에겐 정말 800 dirham 정도 밖에 없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지갑을 열어 보여줬다.
"보이죠? 진짜 없어요."
그러자 아저씨는 즉시 말했다
"진짜, 애 약값이 필요해서 그래... 2,300 dirham! 원가만 받아"
“ATM 있어! 바로 옆이야!”
...2,300?
한국돈 35만원...
이렇게 괜찮은 카펫 값치고는 싸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모르게,
"ATM 어딘데요?"
를 물어보고 있었다.
바로 옆은 무슨...
15분은 걸어 가야 하는 ‘바로 옆’이었다.
문제는,
ATM으로 가는 그 순간까지 나는 아직도
‘내가 선택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는 거다.
ATM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끌고 간 것은,
현실이 아니라 카펫에 대한 나의 자존심이었다.
결국 ATM에서 현금까지 뽑아
내 지갑에 있던 돈과 합쳐
2,300 dirham을 건넸다.
아저씨는 능숙하게 여행자용 포장을 해주며
싱글벙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 말, 지금도 내 귀에 맴돈다...
(그냥 “최고의 호갱님”이라는 뜻이 아닌가?아아 분하다!)
진실의 순간
집에 가다 좀 친해진 동네 지인을 만났다.
"어~ 오늘 뭐 했어?"
"나 카펫 샀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지인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됐다.
"엥? 카펫?… 얼마에? 어디서 샀어? 가게 위치 기억나?"
평소에 사람좋고 농담 좋아하던 지인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이 되어 급박하게 물어보니,
그제야 '아차 내가 한 건 했구나' 싶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사기를 당했다는 생각에 말문이 막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2,300 dirham… 냈는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사색 → 안도로 바뀌는 것이 보였다.
"… 하. 그래. 그 가게 어디 있는지 찾기 힘들지?
그래, 그 정도면 아주 크게 바가지 쓴 건 아냐."
그의 설명에 따르면,
로컬 시세는 700~1,000 dirham.
"나 아는 영국 사람은 12,000 dirham 주고 싸게 샀다고 너무 뿌듯해 해서
그 사람한테는 내가 아무 말도 못 했어"
Souk 카펫 사기는 마라케시 외국인 입문 코스였고,
처음부터 차를 내며, 가게 가장 구석에 앉게 하는 것도,
심리적으로 나가기 힘들게 하는 보편적인 전술이라고 한다.
아들이 아픈데 약 살 돈이 없다~도 카펫 장사의 전형적인 바가지 레퍼토리 라고 했다.
또한 오히려 카펫 좀 사본 사람들이
자국 시세와 비교하다가, 더 크게 당한다는 말도 덧붙였다.(바로 내 얘기 아닌가!)
“마음에 들면 된 거야. 이미 산 건 생각하지 마.”
라는 지인의 말이 괜히 더 아팠지만,
5배나 더 크게 당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이 정도면 꽤 선방한 편이지.” 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한편으론, 당했다는 분노보다,
'평균적인 바가지'의 범주 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내 꼴이 우습기도 했다.
참으로 대단한 마라케시 마스터 아닌가...
뭐 기왕 이미 산거 어쩌랴.
잘 활용해야지.
집에 오자마자, 휑 했던 거실에 카펫을 깔아보았다.
기분을 내보려고,
지난주에 새로 산 티 포트와 찻잔으로 차를 우렸다.
2,300 dirham의 수업료를 내고 얻은 카펫 위에 앉아, 민트티를 따라보았다.
단단한 카펫을 손으로 두들겨 보며,
'그래도 꽤 예쁘지?'
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마라케시의 태양처럼 뜨거웠던 내 오만과 자신감도,
식어가는 민트티처럼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여행 고수(라고 생각했던) 나의 굴욕
영어·불어·일어 다 하고
여러 나라에서 혼자 살며
사기 한 번 안 당해본 내가...
마라케시에서
이렇게 정면으로 당하다니.
그것도 너무 전형적인 수법에.
그날 이후 나는 깨달았다.
오만과 방심은 참사를 부른다는 걸...
마라케시, 역시 만만한 곳이 아니다.
이렇게 나는
매일매일 ‘메탈슬라임’을 만나며
모로코 경험치를 쌓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치에는,
때로는 ‘수업료’가 붙는다...
그리고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다짐한다.
다음엔 결코 그들에게 주도권을 내주지 않으리라...
그리고 내가 선택했다는 착각 속에서 끌려가지 않겠다.
같은 당함이라도,
이번엔 ‘내가 결정한 실패’로 만들겠다.
마라케시가 웃으며 내게 말한다.
“안타깝게도 넌 아직 멀었어...”
✦ 각주
Gabbeh : 이란 남부의 Qashqai(가슈카이) 등 유목민들이 전통적으로 짜온 ‘가베 러그’ 스타일을 뜻하는 이름. 굵은 양털로 짜여 거칠고 단순한 질감, 독특한 문양이 특징이다.
Berber : 모로코 북아프리카 원주민(아마지그/베르베르) 민족을 뜻하는 이름. Berber 마을에서 짜는 카펫은 강렬한 색상과 기하학적 디자인이 유명하다
✦ 〈모로코에서 내가 된 날들〉 시리즈
08. 카펫 앞에서 무너진 나
09.무슴멘과 Shfenj—2026.05.05 19:00(KST) 공개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