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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비 Sep 20. 2022

03. 내 인생의 명장면

당신의 유언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나를 행복하게 하는 그 시절의 풍경들이 있다.

그 빛바랜 추억들을 떠올릴 때면 나는 내 안에 강한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 추억들은 지금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상기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에 때때로 맞이하는 시련의 순간에서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기도 한다.


이토록 따뜻한 추억이야말로 정녕 삶이 준 선물이 아닐까.






내가 어릴 적 살던 집에는 다락방이 있었다. 커다란 창문 틈 너머로 비추던 햇살과 온몸을 어루만지던 바람결, 그리고 경쾌한 웃음소리들. 그 아련한 순간들을 나는 여전히 잊지 못한다.


그곳에서 나는 아빠와 음악을 즐겼다. 아빠가 기타를 치면, 나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잘하건 못하건 상관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최고의 가수가 된 기분이었으니까.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에 아빠는 내게 마이크를 사주셨다. 네모난 전축에 마이크를 연결하면, 울려 퍼지던 나의 노래와 아빠의 선명한 기타 소리는 사춘기 소녀에게 짜릿한 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아빠는 내게 다양한 음악들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Eric Clapton, 이문세, 김현식, Tracy Chapman, The Beatles, Queen, 한영애, 윤도현, 윤상 등 나는 또래 아이들과는 조금은 다른 음악을 들으며, 세상은 넓고 이 넓은 세상을 하나로 연결하는 음악의 힘이란 참 위대하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미지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이 차올랐다. 자연스레 꿈도 자라났다. 그렇게 음악은 다양한 방면으로 나를 성장시켰다.


그때 그 시절에 듣던 음악들은 그날의 우리를 품고 있다. 음악은 불가항력의 ‘시간’조차 가볍게 거스르는 것 같다. 나는 지금도 아빠와 함께 듣던 음악을 들을 때면, 함께 흥얼대던 우리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우리의 다락방에서 아빠는 당신의 어린 시절과 당신의 꿈을 자주 이야기해주곤 하였다.

청년 시절, 아빠에게는 멋진 꿈이 있었다.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하며, 음악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안의 많은 반대와 여려 번의 좌절 끝에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였다.

아빠는 내게 말씀하셨다. 이후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이렇게 지금 나와 함께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부르며 기타를 연주하고 있노라면, 어릴 적 꿈을 이룬 것과 같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나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덕분에 우리 집에는 오래된 카세트테이프가 한가득 있었다. 아빠는 10대, 20대, 30대에 만든 당신의 음악들을 그 당시 카세트테이프에 모두 녹음해두었고, 우리는 함께 그 음악을 듣고 불렀다. 그건 아빠가 젊은 시절부터 모아 온 소중한 자산이기도 했다.


그리고 2005년, 내가 열다섯이 되던 해에 아빠는 당신의 카세트테이프를 모두 내게 선물해주었다. 이제는 아빠를 대신하여 내가 간직해 주길 바란다면서.












[수술하던 날]


2015년, 아빠는 수술대에 올랐다. 남은 우리 가족들은 꼬박 하루를 지새웠다.

수많은 생각들이 나를 지나갔다. 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라는 존재가 무력하게 느껴졌다.

부디 우리가 함께 살아갈 기회가 다시 한번만 주어지기를. 부디 지금보다 더 먼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지 않기를. 나는 삶에 간절히 기도했다.


아빠는 열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코와 눈 주변의 암세포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어려운 수술이었다. 무사히 끝마친다고 하여도 암세포가 모두 제거된다는 보장은 없었고, 사실 그건 한쪽 눈을 희생한 보람이 먼지처럼 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을 모았다. 그 마음이 기적을 일으키기를 바랐다.


나는 아빠의 달라질 얼굴을 미리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떠올려봐도 그려지는 실체는 없었다. 내가 평생 동안 바라본 그 눈동자가 수술 한 번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실은 그 다정한 시선을 다시는 볼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


언젠가, 시간이 훌쩍 흘러 아빠와의 작별이 한참 지난 뒤, 누군가 내게 물었었다. 아빠의 오랜 투병에도 불구하고 왜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하였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한동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수술하던 그날조차 나는 작별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내게 이별이란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수술은 무사히 마무리가 되었다. 다음날 오전이 되자 아빠는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병실로 올라왔다. 달라진 아빠의 얼굴을 처음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수술에 흔적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떨궜다. 수없이 예상했지만, 막상 실제로 마주하니 복잡한 마음이 앞섰던 것이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조금씩 아빠에게 다가갔다. 나를 바라보는 아빠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아빠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것은 아빠의 따뜻한 내면이 변함없기 때문이었다. 외부의 형상이 아무리 달라졌다 해도 나를 바라보던 아빠의 시선과 그 안에 담긴 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면에 존재하는 가치는 외부의 그 어떤 방해도 감히 흔들 수 없는 고귀한 영역이었던 것이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빠를 기다리는 하루 내내 마음을 가로막던 응어리가 단번에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날 내가 경험한 이상한 감정은 아마 내 몸 어딘가에 흔적을 남긴 것만 같다.


이어서 아빠는 내게 나지막이 첫마디를 건넸다.

이 말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여전히 눈물이 차오르곤 한다.


“예나야, 아빠 짱 멋있지?”

내 인생에 다신 없을 명장면이었다.












[아빠의 유언]


이후 우리는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을 가득 메우는 아빠의 존재감이 감사했다. 그저 함께 할 수 있음이 소중했다.

하지만 며칠 후, 우리는 병원으로부터 안타까운 소식을 접해야만 했다.

“수술은 무사히 끝마쳤지만, 우려했던 바처럼 암세포를 모두 제거하지는 못했습니다." 라는 비보를.




어쩌면 그때부터였을까. 나와는 달리 아빠는 우리와의 이별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빠는 잠을 청하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만 갔고, 집안을 가득 메우던 특유의 생기와 에너지는 점점 바래져 갔다.


그리고 어느 날, 아빠는 내게 물었다.

오래전 그 다락방에서 내게 선물한 당신의 카세트테이프를 기억하느냐고. 나는 주저 없이 서랍 속에 담아두었던 상자를 가지고 왔다. 그러자 아빠는 내게 말씀하셨다.


“혹시 먼 훗날, 아빠와 예나가 작별하게 된다면 이 카세트테이프를 들어주겠니?
그리고 이 안에 담긴 아빠와 네가 함께 만든 어린 날의 노래를, 아빠가 젊은 시절 만든 청춘의 노래를 네가 대신하여 펼쳐주지 않겠니?

부디 먼 곳에 있는 아빠에게 너의 예쁜 목소리를 들려다오.
아빠는 언제까지나 기다릴게.”










시간이 흘러 지금의 나는 30년 전, 1980년도에 카세트테이프를 녹음하던 당시의 아빠와 나이가 비슷해졌다.

오래전 아빠의 청춘을 지나, 우리의 다락방을 건너 지금 여기, 나의 서랍장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순간이 흐른 걸까. 그리고 아빠는 지금의 나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싶을까.


그때, 아빠의 이별 준비가 야속해서 눈물로 대신하며 묻어둔 대답이 남아있다. 차마 꺼내지 못했기에 여전히 가슴에 맺혀있는 대답이.


혹시 너무 늦은 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아빠의 두 눈을 바라보며 외치고 싶다.




ⓒ 2021. (김아란) all rights reserved.
“아빠, 나도 짱 멋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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