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니문을 가장한 하드코어 배낭여행(8)
새벽에 너무 추워 눈이 떠졌다. 이가 딱딱 부딪히고, 곱아든 발끝은 이미 내 다리가 아닌 듯하다. 빠이에서 이렇게 추위의 습격을 받으리라곤 짐작치 못했다. 여기서 지낼 며칠을 생각하니 눈 앞이 암담해졌다. 내 로망의 시나리오에 밤마다 손발이 곱아드는 추위 따윈 존재하지 않았단 말이다. 딱 좋았던 치앙마이의 날씨가 떠오르고, 다시 치앙마이로 돌아갈까 잠시 생각도 들었다. 일단 급한 대로 배낭에서 긴 팔 옷을 모조리 꺼내 껴입고, 담요까지 덮고서야 다시 잠이 들었다.
그렇게 아침이 밝고 눈을 떴는데,
엄마야 세상에!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말을 잃었다. 숲과 짙푸른 연못, 반짝이는 햇살이 빚어내는 이 그림 같은 광경은 뭐야! 우리 숙소는 방은 코딱지만 하지만, 벽면 전체로 창이 나 있고 근사한 테라스가 연결되어 있다. 심지어 방 크기의 절반에 달해서, 이 숙소의 메인은 방이 아니라 테라스임이 분명하다고 느껴진다. 어제 자면서 커튼을 치고 자는 걸 깜박했는데, 그 덕에 (더 춥기는 했겠으나) 눈을 뜨자마자 이런 눈부신 광경을 보는구나. 아침 햇살이 초록 잎과 호수 위로 비처럼 쏟아져내리는,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충만해지는 이런 풍경을.
침대에 누운 채로 꼼지락거리며 한참이나 창밖 풍경을 감상하다가, 마침내 이불속을 빠져나왔다. 한껏 기지개를 펴니 아직 굳어있는 몸이 우두득우두득한다. 찬 물 샤워를 하게 될까 봐 살짝 겁이 나긴 하지만 이 상쾌함을 한껏 끌어올리고 싶어 욕실로 직행! 샤워기 옆에 달린 작은 온수통은 뜨거운 물을 콸콸 뿜어내지는 않았지만, 몸의 찬 기운은 충분히 녹여주었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칼의 물기를 탈탈 털고 나오는데 아-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다.
정원으로 나가 아침을 준비했다. 망고를 자르고, 딸기는 씻어서 요거트를 듬뿍 부어주고, 캐슈너트 한 움큼에, 어제 사온 싸구려 빵과 치앙마이 리조트에서 선물로 준 수제잼까지 꺼내니 진수성찬이 아닌가. 여기에 숙소에서 제공해주는 차와 커피까지, 너무나 풍족하고 행복한 아침 식사다.
그리고 무엇보다 필요했던, 햇볕! 간밤의 추위는 다 어디로 가고 눈부신 햇살이 온몸에 팡팡 쏟아져 내린다. 하늘도 파랗고, 공기는 청량하다. 젖은 머리카락이 살짝살짝 바람에 흔들린다. 우리 옆방에 머물고 있는 여행자도 담요를 몸에 두른 채 그네에 앉아 한들한들 광합성 중이다. 아, 나는 정말 오아시스를 만났구나!
숙소에서 오늘 하루 오토바이를 빌리기로 했다. 오아시스 빠이의 주인장, 코너Connor는 오토바이를 처음 타보는 태봉을 데리고 골목 끝에서 끝까지 뛰어다니며 코치 역할을 한다. 나는 훈련에 매진 중인 두 남자를 기다리며 숙소 구석구석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랑스럽다, 이곳.
행복한 아침을 한껏 만끽하던 중, 어제 만난 친구들이 궁금해졌다. 리타 할머니와 메리는 어떤 아침을 맞고 있을까? 핸드폰을 열어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보았다.
"Good morning, Mary!"
어제 빠이로 넘어오는 길에, 함께 여행 중인 미국인 모녀- 리타 할머니와 메리를 만났다. 치앙마이에서 빠이행 교통편을 예약하면 썽테우(1톤 트럭을 개조해서 만든 현지 교통수단)으로 당일 숙소마다 돌며 여행자를 픽업한다. 썽테우는 우리를 가장 먼저 태웠고, 한참을 달려 두 번째 숙소에 멈춰 섰다. 한참을 기다리니 금발의 젊은 여자가 나타났고, 아아주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베개를 옆구리에 낀 회색머리 여전사 할머니가 나의 시선을 압도하며 등장했다. 사자 갈기가 연상되는 긴 머리에 헤어밴드를 한, 강렬한 첫인상의 할머니는 목소리도 쩌렁쩌렁, 시종일관 수다가 끊이지 않았다.
리타 할머니, 자꾸 우리 보고 귀엽다 귀엽다 이러고..(내가 보기에는 메리가 백 배는 더 귀여운 거 같은데;;) 메리는 허니문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오마이갓 오마이갓을 연발하며 우리를 얼싸안고. 호기심 가득한 질문 세례와 격한 리액션까지, 빠이까지 오는 몇 시간 동안 지루할 새가 없었다. 빠이에 도착한 후, 헤어지며 거듭 인사를 나누었다. 메리는 우리를 또 만나고 싶다고 했고, 나는 "빠이는 작은 곳이니까 우리는 아마도 다시 만날 거야" 대답했다. 리타 할머니는 다음에 만나면 꼭 너희 사진을 찍게 해달라고 했다. 너네 너무 귀엽다며..(할머니, 제 나이를 아시면...)
"오늘 같이 저녁 먹을래?"
나의 메시지에 메리가 답을 보내왔다. 세상에서 가장 정겨운, 밥 먹자는 말과 함께.
접선은 오후 6시, 빠이 강 다리 앞에서.
그 전까지, 우리는 숙소에서 빌린 오토바이로 빠이 외곽을 둘러보기로 했다. 코너가 알려준 정보에 의하면 폭포도 있고, 산도 있고, 카페도 있고, 농장도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인터넷에 빠이를 검색해볼 때마다 어떤 카페 이름이 자꾸 보이던 기억이 났다. 사진 속에서 그곳은, 말할 수 없이 아련한, 빠이의 느낌 그대로를 대변해주는 듯했다. '저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면' 하고 바랐었다. 그랬기에 폭포도, 산도, 농장도 괜찮을 테지만 일단 카페에 먼저 가보기로 했다.
커피 인 러브, 그곳은 명성대로 몹시 아름다웠다. 그리고 불행히도, 나의 또 다른 예상 역시 틀리지 않았다. 카페 내부는 앉을자리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붐볐고, 심지어 잠시 후에는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일대를 점령했다. 나는 간신히 차지하고 앉은 구석자리에서, 최고로 엉망인 커피를 마시며, 이미 변해버린 빠이를 서글프게 목격했다.
오토바이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니 오후 다섯 시. 맡겨둔 빨랫감을 찾고, 근처의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다 다리 앞에 도착했다. 저 멀리서부터 둘의 모습 - 리타 할머니의 거침없는 걸음걸이와 두 팔을 들어 흔드는 메리의 손짓에 웃음이 났다.
어제 리타 할머니와 메리가 우리 결혼사진을 너무너무 궁금했던지라, 낮에 숙소에 있으며 저장해둔 결혼식 사진을 꺼내보였더니 환호하며 난리가 났다. 리타 할머니는 너네짱귀엽다를 연발하다가, 내가 계속 '10년 전에...'를 운운하며 여행 이야기를 꺼냈더니 대체 몇 살이냐고 묻는다. 나이를 밝히니 눈이 튀어나올만한 리액션을 선보이며 아연실색. 이제 막 대학 졸업한 메리보다 더 어린 줄로 생각하셨지 뭔가. 무려 열다섯을 깎아주시다니. 고마워요, 할머니! (여기서 놓치면 안 될 핵심은, '나보다 어린' 태봉 나이는 실제와 얼추 비슷하게 보셨다는 거 ㅋㅋㅋ)
그 날 우리가 저녁을 먹으며 함께 나눈 이야기가 백만 스물두 가지. 각자의 삶 이야기, 여행 이야기, 종교 이야기, 서로의 Dream place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하고, 웃고, 감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이 우리 커플에게 유난히 애정을 보여주어 더 신이 났고, 그렇게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울컥 뜨거운 감정이 올라올 때가 몇 차례 있었다.
Everyone wants a piece of diamond.
Everyone needs a piece of diamond.
리타 할머니는 <the way>라는 영화를 보고, 죽기 전 까미노를 걷는 것이 가장 큰 버킷리스트라고 했다. 메리는 마추픽추를 가보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곳에 다녀왔다. 나는 태봉과 함께 오로라를 보고 싶다고 했고, 리타 할머니는 남편이 지질학자라서 오로라를 잘 안다고 했다. 누군가가 이미 경험한 무엇은 또 다른 누군가의 버킷리스트일 수 있고, 반대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무엇은 다른 이의 간절한 염원일 수 있다.
문득 내가 물었다.
"빠이에는 왜 왔나요?"
메리는 친구의 강력한 추천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 빠이는 이렇게 이미 와 본 소수의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 오던 곳이었다. 이제는 가이드북과 블로그에 넘쳐나고, 관광객도 넘쳐나는 그런 곳이 되어버렸지만.
"빠이에 와서 반절은 행복하고, 반절은 행복하지 않아요. 내가 너무 늦게 온 걸까요?"
나의 말에 리타 할머니가 답했다.
"누구나 다이아몬드를 원하고, 누구에게나 한 조각의 다이아몬드가 필요하지. 그러니 우리 함께 나누어 쓸 도리밖에."
이야기는, 꿈꾸는 장소에서 꿈꾸는 삶으로까지 이어졌다. 태봉과 나는 우리가 살고 싶은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지금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 잘 전하고 싶어 주절주절 한참을 설명했는데, 우리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리타 할머니의 한 마디.
"심플 라이프를 살기 원하는구나"
"아 맞아요, 심플 라이프! 바로 그거예요."
"너희들은 분명히 그렇게 살 거야. 너희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어."
설명하기 어려운 내 마음을, 내가 사는 방식을, 나라는 사람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언어를 만난 기분이었다. 이유 없이 눈물이 흘렀다. 여전사 같은 리타 할머니와 자유롭고 따뜻한 영혼의 메리는 단단하고 꽉 찬 열매 같았다. 그들과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내 안에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것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밤이 깊어 헤어짐의 인사를 나눌 때, 리타 할머니는 나를 포옹하며 귀속말로 속삭였다.
"네 남편이 너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그녀의 애정 어린 말에, 천 마디 축복의 말이 담겨 있었다.
다음 날, 리타 할머니는 내 페이스북에 찾아와 인사를 남겼다. 그 글을 읽으며, 언젠가 미국에 가서 리타 할머니와 메리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그녀는 우리가 미국에 오거든 꼭 자기 집을 방문해달라고 했다).
그녀는 이런 문장을 남겨놓았다.
"너희는 내 인생에 만난 가장 사랑스러운 커플이란다. 너희를 만난 건 축복이었어."
"리타 할머니,
나는 다이아몬드를 찾기 위해 빠이에 왔는데
내 로망 속의 빠이를 만나기에는 나는 너무 늦게 온 거 같아요.
하지만 신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멀리 이곳까지 온 나를 다독이시네요.
리타 할머니, 당신은 내가 빠이에서 얻은 한 조각의 다이아몬드 같아요."
(계속)
그리고 사진 몇 장.
리타 할머니와 메리와는 지금도 페이스북을 통해 연락을 나누고 있다. 메리의 페북에 올라있는 두 장의 사진과 글을 허락을 맡고 가져왔다.
가져온 이유는,
위) 현재 Mary의 프로필 사진과 그 아래 적혀있던 글(a wild Mary in her natural habitat)이 그녀와 너무 잘 어울려서.
아래) Mary가 Mother's Day에 올린 글인데, Rita할머니를 묘사하는 글이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아서. 사진은 태봉이 찍어줬던 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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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네 번째 사직서
1. 설레기는 개뿔
3. 두려움의 벽이 허물어진 자리, 오늘의 시간이 스며들다.
4. 치앙마이, 네가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