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며 배우는 기쁨에 대하여
앞으로 프랑스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이제는 허리띠를 졸라 매고 본격적으로 덤벼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프랑스어를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지치고 실망해서 파리로 가는 길에 차에 치인 시체가 되어 ‘늙으면 언어를 배울 수 없다’는 통계에 가련한 숫자를 하나 더 얹게 될 것이다.
윌리엄 알렉산더, <나이 들어 외국어라니>, 65p
서른다섯이 넘은 나이에 새로운 외국어를 시작해 고군분투하다 보니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다. 이미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싶은 마음에 배우고 싶은 노파심에 주저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부끄러운 마음으로 나의 좌충우돌 중국어 여정을 기록했다.
지난 몇 년간의 베이징에서의 시간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고 과감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중국어’를 만났기 때문이다. 중국어가 앞으로 내 삶에서 어떻게 활용될지 솔직히 잘 모르지만 어떤 삶을 살든, 어떤 일을 하든 나는 늘 중국을 공부하고, 중국 콘텐츠를 즐기고, 중국 소식을 궁금해할 것이다. 그러니 '송두리째 바꿨다'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요즘 내가 중국어를 습득하는 방식은 예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사실 6년 전 중국어를 처음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 계획한 부분이기도 했다. 나의 중국어 습득기는 5단계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어학당에서 중국어 기초에 집중하던 1단계 (17-18년)
-중국어 학원에서 읽기 능력을 끌어올리던 2단계 (19년)
-본의 아니게 한국에서 머물러야 했던 9개월 3단계 (20년)
-도시를 산책하며 내가 좋아하는 관심 분야로 공부하던 4단계 (20-21년)
-중국 문학, 역사, 드라마 총망라하며 자유롭게 접하는 5단계 (22년~)
언어를 습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왜 이 언어를 공부하는가?”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목표를 가지고 언어를 습득하기 마련이니, 자신의 꿈과 목표 지점을 명확하게 정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명확한 목표는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슬럼프 기간에도 큰 도움이 된다.
나의 목표는 '중국 관련 콘텐츠를 편하게 읽고, 즐기는 것'이었다. 포털 회사에서 IT 서비스, 문화 콘텐츠, 브랜드 홍보를 오랫동안 담당해 왔던 내 과거와 연관된 소망이기도 했지만 사실 원체 나라는 사람이 책, 드라마, 웹툰 등 문화 콘텐츠를 광범위하게 좋아하기 때문이다. 한국 콘텐츠만 해도 재미있는 것이 이렇게 많은데, 중국 것도 편하게 볼 수 있다면 앞으로 남은 인생이 심심할 틈 없이 즐겁겠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전 세계 사분의 일을 담당하는 중국인들만의 문화, 브랜드도 궁금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어를 꽤 괜찮게 해야만 했다.
1단계: 학교 어학당에서 중국어 기초의 큰 산 넘기
17년 2월,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집 근처 대학교 어학당에 등록하고 중국어를 시작했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나는 베이징에 처음 왔을 때 한자 ‘7(七)’과 ‘9(九)’가 헷갈리는 한자 바보였다. 하지만 나름 언어 감각이 있다고 생각해서 약간의 자신감도 있었다.
11년 만에 다시 학생이 되었다는 즐거움으로 처음에는 그야말로 중국어에 빠져 지냈다. 새벽까지 단어를 외우고, 들리지도 않는 드라마를 봤다. 하지만 서른다섯이 넘어 처음 배우는 외국어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중국어에만 집중하고 싶어서 한국 콘텐츠도 전혀 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보고 또 봐도 그림 같은 한자, 외우고 외워도 까먹는 단어, 성조는 어찌나 어렵고, 베이징런들의 발음은 왜 하나도 안 들리는 것인지… 무언가를 새로 배운다는 즐거움과 절대 늘지 않는 좌절감 사이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던 첫 1년이었다. 나만의 공부법을 만들어 갔다.
중국 생활에 적응하는 시기였던 첫 학기를 보내고 두 번째 학기 때는 아는 기초 단어들이 조금씩 늘어갔다. (하지만 이때도 얼화가 심한 베이징런들이 하는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세 번째 학기가 되니 중국어 문법이 대략 정리가 되고, 드라마 속 단어들이 한두 개씩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회화는 어려웠다. 다들 학교 수업으로는 회화가 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정답이었다. 하지만 그땐 학교 숙제만으로도 벅차서 '푸다오(辅导_회화)'까지 동시에 할 여유가 없었다. 학교를 관두고 학원으로 옮겨야 하나 고민하다 장학금을 받고 네 번째 학기를 다녔다. 이 시기에 2년간 배웠던 내용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HSK 5급을 공부했다. 270점으로 나름 고득점을 얻었지만 아직도 회화는 어버버버. 의미 없는 점수를 받아들고 좌절, 좌절 또 좌절.
그래도 시험은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문법을 한 번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1-2년 정도 공부를 했다면 HSK 시험 응시를 추천하고 싶다. 이 시기에 예전에 소개한 언어 교환 앱 ‘헬로우톡’을 많이 활용했다. 이 앱에서 중국 친구를 몇몇 사귀고 그들에게 다양한 문화도 배웠다.
하루에 간단한 문장 다섯 개라도 외우자는 마음으로 네이버 '오늘의 회화'를 매일 외웠다. 오디오 클립 앱에 오늘의 회화 버전이 매일 올라오는데 들으며 복습했다. 지겨웠지만 어떤 것이든 7번 반복해야 장기 기억으로 간다는 사실을 명심했다.
2단계: 학원 수업으로 회화 실력과 읽기 실력 키우기!
2단계는 ‘한링크’라는 학원을 다니면서 시작됐다. 간단한 회화와 읽기는 가능했지만, 아직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조바심이 있었기에 학원 수업도 학교 수업만큼 빡빡하게 짰다. 이때의 목표는 회화도 회화지만 ‘읽기 실력 키우기’. (2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는데 여전히 기사 하나를 읽으려면 하루 종일 걸려서 정말 슬펐다.)
한링크 학원의 Robin 쌤에게 주로 수업을 들었었는데, 단어를 쪼개서 접근하는 방법을 알려주셨고, 이것은 다른 곳에서 새로운 단어나 성어를 만났을 때 뜻을 유추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정말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잘 가르쳐서 감탄하며 HSK 6급 수업을 들었다.
회화를 위해 소규모로 말하기 수업도 하고, 마음 맞는 언니와 쓰기 수업도 개설했다. 쓰기 수업은 주제를 정해 A4 한 장 정도 분량으로 매주 썼는데, '기록 중독자'로서 무척 재미있었다. 이 시기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단어를 많이 외웠다. 읽기 실력을 위해서 말랑한 내용이 담긴 감성 에세이와 중국어 동화를 읽었다. 중국어 동화라고 얕보면 안 된다. 학교에서는 배우지 않는 동사가 쏟아지니까. 회화를 위해 전화 중국어를, 드라마와 TV 예능 프로그램도 함께 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중국어 습득 3년 차, 여전히 즐겁게 공부했지만 이때는 중국어라는 언어에 빠져 있어서 원래의 목표에서 살짝 빗겨 나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3단계: 중국 드라마 100번 보기 도전!
코로나 사태로 인해 원치 않게 한국에 머물게 되면서 2단계가 자동으로 종료되었다. 한국에서 불안정하게 보낸 9개월은 어찌 보면 암흑기라고도 볼 수 있을 텐데, 결과적으로는 중국어 회화가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하루 종일 아이를 케어해야 했고, 코로나 시국이라 학원을 다닐 수도 없었기에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대안은 <9등급 꼴찌, 1년 만에 통역사가 된 비법>에서 장동완님이 제안한 비법 '100LS'로 '중국 드라마 보기'였다. 그때 한창 빠져 있던 드라마 ‘누나의 첫사랑’ 3회를 100번 보기로 했다. 100번은 결국 실패했지만 프로젝트의 결과는 꽤 놀라웠다. 회화가 꽤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그리고 이때 드라마 속 재미있는 표현들을 찾아서 정리하는 작업을 했는데, 수업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표현들이 많아서 신이 났다. 바이두 이미지 검색과, 브이 라이브 자막도 많이 찾아봤다.
4단계: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껏 좋아하면서 배우기
9개월간의 한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베이징에 돌아오면서 나의 첫 목표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다. 중국어에만 집중하다 보니 생각보다 베이징이라는 도시와 중국 콘텐츠를 접할 기회가 많이 없었다. 남은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게다가 코로나 사태가 내게 '지금, 현재'를 즐겨야 한다고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앞으로 따로 중국어 수업은 하지 않고 원래 목표대로 도시를 산책하며 만난 공간, 브랜드와 콘텐츠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어 또한 자연스럽게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이후 중국어 습득의 메인 자료는 각 브랜드의 위챗 공중 계정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중국 브랜드들은 위챗 공중 계정을 활발하게 이용하고 있다. 미술관, 건축물, 브랜드를 만나면 무조건 위챗이나 웨이보 계정을 등록해 그곳에 올라온 공간과 브랜드, 상품에 대한 소개 글을 읽는다. 그들이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소식지도 꼭 챙겨 본다. (후통처럼 위챗 계정이 없는 공간 소식은 바이두를 통해 얻는다.)
마음에 쏙 드는 공간이나 브랜드를 만나면 창업자를 검색해서 관련 인터뷰를 읽어 본다. 창업자의 철학이 브랜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자료이기 때문이다. 남기고 싶은 자료는 정리해서 기록한다. 일주일에 3-4번 도시를 걸으며 이런 작업을 1년간 반복했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만 베이징이라는 도시와 각종 브랜드 스토리, 중국인들의 사업 철학을 정말 많이 알게 되었고, 후통을 걷다 보니 중국 역사 지식도 덤으로 따라왔다.
<theBeijinger><Jingkids>나 <TimeOut北京> 같이 베이징 소식을 정기적으로 정리해서 전달해 주는 매체 서비스도 큰 도움이 됐다. 왕홍(파워블로거)들의 각종 후기나 SNS도 좋은 학습 자료다. 학교&학원 수업 교재나 중국 드라마 대본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태의 자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책, 드라마, 예능, 웹툰, APP 등 문화 콘텐츠는 늘 기본 토양이 되어준다. 워낙 다양한 콘텐츠가 많아서 요즘은 하나를 깊게 보는 대신 다양하게 보려고 노력한다. 아이치이, 요우쿠, 티빙, 뉴스, 위챗 계정의 브랜드 소식 등 다양한 루트를 통해 하루에 하나 정도는 새로운 콘텐츠를 발견해 보자는 게 목표다. 이것은 일종의 덕질과도 같은 것인데, 덕질을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자연스럽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 바로 콘텐츠다.
새로운 드라마 발견- 마음에 드는 배우 발견- 이 배우가 나온 예능 발견- 이 배우가 광고하는 브랜드 발견- 상품 발견- 소개하는 책 리스트 발견-심지어 이 배우의 전 연인 발견- 전 연인이 출연한 드라마 발견- 쩜쩜쩜쩜
보고 싶은 건 많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고 늘 그렇다.
시안, 핑야오 고성 등 오래된 도시를 여행하며 역사에 관심이 많아져서 관련 책을 많이 읽기도 했다. 이후 중국 문학으로 넘어왔다. 나름 문학 전공이었지만 정작 중국 문학을 접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루쉰, 라오서, 모옌 등의 작품을 만나다 보니 문화대혁명 등 중국 근대사와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졌다.
요즘 스터디 멤버들과 함께 하는 낭독 루틴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어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각자 원하는 분량의 중국어를 읽고 메신저로 공유한다. 누군가는 신문을 읽고, 누군가는 소설을, 누군가는 좋아하는 중국 배우의 웨이보 계정을 읽는다. 무엇을 읽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매일, 즐겁게 읽는다는 것이 중요할 뿐. 이 시간들은 내게 낭독의 힘, 함께 공부하는 것의 힘을 알려 준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아쉬움투성이지만 되돌아가도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기 때문에 아쉬움은 저 멀리 보내고 지금 하고 싶은 것들에 더 집중하려 한다.
35살에 처음 배워본 새로운 언어. 간단히 정리하자면 ‘아줌마의 좌충우돌 언어 습득기’ 정도겠지만 누구보다 즐겁고 치열하게 중국어를 습득한 나였기에 ‘프로공유러’, ‘프로기록러’의 자세로 정리해 봤다. '늘지도 않는 중국어 관둬버려야겠어!'라고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우린 절대 '늙으면 언어를 배울 수 없다'라는 통계에 가련한 숫자를 하나 더 얹어서는 안되니까.
이 중국어 습득기는 죽기 전까지 업데이트할 예정인데 아흔 살 정도에 23단계 정도로 마무리되면 좋겠다. 그땐 지금보다 훨씬 더 편하게 중국어로 된 소설도 보고, 시도 읽고, 매끄럽게 번역도 하고, 중국 브랜드에 대해서도 많이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두근두근.
노트에는 내가 좋아하는 문장들이 쓰여 있다.
别气馁! 좌절하지 마!
不怕慢就怕站! 늦는 것을 겁내지 말고, 멈추는 것을 겁내라!
未来还没到 一切都还来得及 没有什么不能改变!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어, 그 무엇이든 늦지 않았으니 뭐든 바꿀 수 있지.
我们共勉! 우리 서로 힘내요!
언젠가 ‘늦은 나이에도 가능한 중국어 함께 배우기 연구소’라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