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왠지 모를 찝찝함에 휩싸일 때가 있다. 이런 요상한 기분은보통 다음날 술이 깨면 사라지지만, 한동안 마음에 머물며 하루의 기분을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진다.
오랜만에 마주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후배는 약간의 취기가 도니 시니컬해졌다. 대화 중 아이들 얘기가 나왔다. 딸내미는 춤과 노래, 피아노 연주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꿈이 아이돌이라고 했다.
후배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솔직히 아이돌 할 만큼 예쁘다고 생각해? 요즘 예쁜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연습생들도 넘쳐나고. 근데 그걸 하라고 한다고?"
'요즘 애들 다 그래'라는 일반적인 반응과 달랐다. 흠칫했다. 차라리 공부나 시키라는주동이를 한 대 쳐주고 싶었다. 참았다.초등학생 상당수가 연예인이나 유투버라는 꿈을 가진다는 걸 그는 몰랐다. 부모와 자식 물정을 잘 모르는 미혼이었다. 짜증을 숨기고 침착을 가장한 채 말했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이 꿈이 있다는 거 자체가 기특한 일이야. 미리 나서서 안 될 거라고 말하는 부모 없을걸. 어차피 애들 꿈은 수시로 바뀌는데 뭐."
한 템포 쉬었다가 덧붙였다.
"부모 눈에 자기 자식은 다 예뻐 보여."
영화에 나오는 '가족은 건드리지 말아라'라는 말이 떠올랐다. 기분이 상했지만 그냥저냥 전반전을 자연스레 넘겼다. 후반전이 남아 있었다. 취미인 글쓰기, 책 쓰기 얘기로 대화가 흘렀다.
"남들 잘 보지도 않는 자기계발서 그만 쓰고 소설 같은 걸 써서 대박을 좀 내봐."
응원을 가장한 비아냥거림. 문득 예전에 만났을 때 "책을 좀 재미있게 써봐"라면서 몇 권의 베스트셀러 제목을 들먹이던 일도 떠올랐다. 정작 내 책을 읽지도 않고 하는 소리였다. 선물로 보내 줬음에도 불구하고. 의문의 평가절하였다.
'오늘 왜 만나자고 한 걸까. 사람 염장 지르려고 만나자고 한 게 분명해'
마음에 병이 들면 찌그러지고 삐딱한 말이 나온다. 마음이 병들어 봤기에 잘 안다. 후배의 마음에도 감기처럼 스치는 병이 머문 것 같았다.
유쾌하지 않은 자리였다. 티내지는 않았다. 그저 술기운에 흘러넘친 말이라 여기기로 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을 떠올리며.
인간관계에 대해 늘 생각이 많다. 만나면 기분 좋은 사람도 많은데, 굳이 사사건건 기분 상하게 하는 사람과 마주할 필요 있을까.
피천득의 <인연>에 나오는 문구를 참 좋아한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연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옷깃이라는 운명으로 인연을 맺었어도 살다 보면 굳이 인연을 이어가지 않아도 될 이들이 있다.